천선란 작가님의 단편소설 <노을 건너기> 를 읽고 만든 음악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출간 전, 책소개와 책표지, 그리고 '작가의 말'을 읽고 만든 음악이다. 책소개만 읽고 '랑과 나의 사막'이 잠깐 떠올랐다. 이번 책은 어릴 적 나의 외로움이라면 '랑과 나의 사막'은 타인을 향한 나의 그리움. 그 차이가 아닐까.
작년 11월, 랑과 나의 사막 종이책을 캐나다 출국 전에 운 좋게 배송받을 수 있었다. 이번 예약판매가 떴을 때 나는 출국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다 못 받고 가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히 이틀 전에 받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이틀 안에 음악을 만들면 되는 거였다.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기 시작한 건 책소개를 읽고나서부터였다. 외로웠던 시절의 나를 만나는 훈련이 재밌게 다가왔고 출국 전에 마지막 작업물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시작했다.
<여섯 번째 별>이 '파'음으로 시작했다면 <마주한 노을>은 '파샵(F#)'으로 시작한다. 나는 왜 이렇게 파에 집착하는가..! *(<여섯 번째 별> 작업 글에 그 이유가 나온다.)
보통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음악을 만드는 게 나의 작업 방식이긴 하지만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책소개와 책표지만으로 느껴지는 감상 하나를 가지고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전자는 도저히 그 장면을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나칠 수 없기 때문에 벅찬 마음을 가지고 만든다면 후자는 감각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래서 메인 멜로디가 완성됐다. 책표지에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나는 계속해서 사막 위에 걸쳐진 노을을 상상했다. 숲속도 모래도 아닌 곳에서 방황하는 나와 그런 나를 보는 '어린 나' 가 손을 잡고 노을을 건너는 것.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와 지구가 아닌 아주 머나먼 우주 속으로 탐험을 떠나는 나를 상상하며. 이 순간에 들을 수 있는 음악은 어떤 형태로 다가와야 할까에 대해 집중했다.
메인 멜로디와 뼈대를 다 만들고 난 뒤에 고민이 많아졌다.
이번에도 비슷한 감상으로 느껴지면 어떡하지.
내가 만드는 음악들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조용히 00에게 내가 만든 음악 두 곡을 들려줬을 때, 00는 이렇게 말했다.
"둘이 이어지는 거 같아."
"조금 비슷한가?"
"응 그러네."
"다 똑같이 들려."
나는 점점 내 음악들의 정체성(?)이 잡혀지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00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걸 어떻게 극복할까."
나는 극복할 수가 없다. 내가 만든 음악들은 나로부터 시작됐고, 그때 나는 인정했으니까. 아. 나는 이런 감성을 가진 음악을 하고 싶은 거구나. 이건 내가 어떻게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는 거야.
그렇게 해서 바꿀 수는 없지만 이 감성을 다채롭게 만들 순 있지 않을까 싶어 여러가지 시도와 도전을 해보려고 하는 중이다.
그렇지만 <마주한 노을> 메인 멜로디를 만들고 난 뒤에 든 생각은, '똑같다.' 였다.
같은 피아노를 계속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그런 걸까. 답은 아니다.
결국 나는 책을 받기 바로 전날에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물론 포기한 건 아니었다. 출국 뒤에도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난 후에 생각은 곧장 변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장면이 딱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어린 공효'에게 '지금의 공효'가 숨을 고르게 내쉬는 법을 알려준 장면과 마지막 거미를 마주하며 물리치고 난 후 작별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만든 메인 멜로디는 어느 장면에 어울릴까 계속해서 고민했다. 더 좋았던 장면은 전자였지만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건 후자였다. 거미를 물리치는 장면에는 분위기가 고조되며 압도할 수 있는 소리들을 쓰면 잘 흐름상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전자를 놓을 수가 없었다. 중력 훈련을 할 때 쓰는 방법이라며 숨을 내쉬는 법을 알려주는 공효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뼈대는 다 무너졌고 멜로디만 남은 채 다시 처음부터 작업하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건 둘 다였다.
그냥 둘 다 넣어버려.
그렇게 무모한 도전이 시작됐다.
중간 부분에 몽롱한 피아노 소리가 떠도는데 중력의 소리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넣었다. 공기 같으면서도 아닌 것이 나를 들뜨게 하고 차분하게 해서 좋았다. 우주로 향하는 공효는 이 소리를 기억해줄까, 떠올려줄까 하는 재밌는 상상도 하면서 만들었다.
그렇게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마침내 팀파니를 시작으로 거미를 물리치는 두 공효가 있다.
절정 부분에서는 튜바(Tuba)와 호른(Horn) 소리가 메인이다. 이 둘의 멜로디를 만들 땐 정말이지 행복한 손짓으로 이리저리 손목을 돌리면서 만들었다. 마치 내가 지휘자가 된 것처럼, 내 앞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그래서인지 이 절정 부분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이게 된다. 아. 쓰면서도 정말 재밌게 만들었다 이 부분은. 제일 오래 걸렸고 깐깐하고 답답했지만 그만큼 재밌었다.
좋아하는 작가님이라서기도 하지만, 너무 작가님의 소설들로만 음악을 만드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단순히 좋아서는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건 보기 좋은 건 아닐 거 같아서. 그러다 나는 그냥 작가님이 그리는 세계와 그 속에서 자신의 험난하지만 다채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이 좋아서 그런 거구나 하고 다짐했다. 무모하지만 도전을 하고, 맞닥뜨리고, 싸우고, 그렇게 구하는 작가님의 인물들과 캐릭터를 나는 사랑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편안했다. 나를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아이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나는 끌어안을 수밖에 없겠구나.
모두 다 제각각의 성질과 모양을 가진 사랑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 사랑이 어떤 식으로 발화할지 우린 알 수 없지만 그 사랑의 첫번째 발걸음이 나에게 친절하기와 타인에게 친절하기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사랑 없이는 단 한 마디, 단 한 줄의 음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이젠 너무 잘 안다.
사진 고르기는 여전히 재밌다. 노을 건너기라 노을이 찍힌 사진 어디 없나 둘러보니 한 장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 20년도에 노을을 카메라로 담고 있는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가 나와 그 아저씨의 뒷모습을 담아줬는데 그 사진 속 노을과 아저씨의 카메라가 좋아서 가져와봤다.
제목 짓는 것도 꽤나 오래 걸렸다. 그래도 '노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서 이리저리 써봤는데 입에 착 붙는 게 없어서 고생 꽤나 했다. (오렌지 태양이라는 말도 나왔다가 기각했다..) 길게 짓고 싶진 않아서 마구 내뱉다가 <마주한 노을>이 나왔다. 마주보는 이라고 쓰려다가 '마주한'이 더 좋았다. 공효와 어린 공효가 서로 마주보는 장면이 드디어 둘이 마주했구나.. 하는 기분이라.
역시. 재밌다.
https://youtu.be/bGCE72ipstI?si=WnOmqcxHmJkJgC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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