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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감 Jan 30. 2021

여덟 번째 수필

미열(美熱) - 2020.12

어제는 평소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잠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책을 읽고 있는 눈꺼풀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불을 끄고 머리를 베개에 기대었다. 요즘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었으니 이번 기회로 취침시간을 앞당기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기에 졸음에 저항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출근하시기 전에 내 방을 찾아와 잠자는 아들의 이마를 어루만지고 가신다.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으로 매일 출퇴근하시는 아버지는 아직 어두컴컴할 때 일어나셔서 출근 준비를 하신다. 예전에 차 없이 시외버스로 출근하실 때는 지금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셨었다. 밤새 술잔을 기울이다 들어온 나는 불이 켜진 화장실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나오시는 아버지를 보고 술이 번쩍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불 밑에서 새근대고 있는 와중에 아버지의 두꺼운 손이 이마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잠에 취해있었지만 시원한 감촉은 이마를 타고 전해졌다. 자는 동안 뒤척이며 걷어차 버린 이불을 다시 나에게 덮어주시고 아버지는 조용히 나가셨다. 졸음으로 무거운 입술을 차마 떼지는 못하고 속으로 '잘 다녀오세요'라고 읊고 나는 다시 잠을 이어갔다.


방을 채운 공기가 따듯하다 못해 후텁지근했다. 밤새 켜놓은 보일러가 부지런히 제 역할을 해준 덕이다. 이불도 온전히 나를 감싸주어서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체온은 조금 올라간 듯했다. 미열이 느껴졌다.


미열(微熱). 그다지 높지 않은 몸의 열이라는 단어지만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美熱이 연상된다.

아름다운 열.

짝사랑을 할 적에,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달아오르곤 한다.

이름을 떠올려보거나 남몰래 다정하게 불러보기도 한다.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눈도 못 마주치고 있는 내가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을까.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서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눈을 마주치면 들킬까 봐, 떨고 있는 내가 들킬까 봐 시선을 떨어뜨리는 건데.  


다른 사람들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수 있으면서 정작 가장 궁금한 당신에게 말 붙이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기도 하다. 멈출 줄을 모르고 쌓여가는 마음의 크기는 가슴의 미열(美熱)에 열기를 더한다. 하지만 내가 품고 있는 이 온기를 언제나 상대방이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다. 홀로 키워온 애정이 끝끝내 닿지 못하기도 하고, 오히려 자신이 그 열기에 데어 일찍이 떨어져 나가 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나를 몽땅 태워버릴 만큼 누군가를 애타게 좋아하는 나 자신을 나는 좋아한다.


이불을 걷어내고 창문을 열었다. 밀려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다. 내일은 보일러를 켜지 않고 자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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