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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감 Feb 04. 2021

편지

얇게 입고 나갔던 어느 날 - 2021.02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오늘 저는 평소보다 좀 더 아침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원래 같았다면 8시 반쯤 일어나 슬슬 학원으로 출근할 준비를 했을 텐데 최근 학생들이 개학을 하는 바람에 오전 수업이 없어진 관계로 저의 출근도 덩달아 늦어졌답니다. 늦은 새벽이 돼서야 비로소 잠에 드는 저는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이 사실 좀 부담스러웠는데 오늘만큼은 느긋하게 잠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휴일이라 집에 계시던 아버지와 함께 간단한 점심을 먹고 저는 집을 나섰습니다. 유통기한이 아마 지났을, 그래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까먹고 있던 식빵을 꺼내 버터를 두른 팬에 노릇노릇하게 구웠습니다. 노릇노릇, 이란 표현이 조금 미안할 정도로 태운 것도 몇 개 있긴 합니다 사실. 딸기잼과 땅콩버터 그리고 크림치즈까지, 빵에 발라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꺼내 이것저것 조합해서 먹었습니다. 저는 딸기잼과 크림치즈의 조합이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대신 이 조합, 칼로리는 조금 높을지도 모릅니다. 역시 맛의 정도는 칼로리의 정도와 비례관계인 것이 아닐까요?  


집을 나서기 전에, 아침에 볼일이 있어서 외출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께 저는 오늘 날씨가 어떻냐고 물어봤습니다. 따듯하진 않지만 그렇게 춥지도 않더라는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저는 맨투맨에 목도리를 두르고 가을용 후드를 하나 걸치고 나섰습니다. 아버지의 말마따나 많이 춥지도, 그렇다고 따듯하지도 않은 날씨였지만 제가 조금 얇게 입은 탓인지 저는 오들오들 떨어야 했답니다.


출근까지 시간이 남아서 가는 길에 있는 도서관에서 공익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친구를 불러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즐겨 찾는 도서관이지요.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근무할 수 있다니 참으로 운이 좋은 녀석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약 4주 만에 보는 거지만 짧아진 머리를 제외하곤 여전하더군요. 그간의 일들을 시시콜콜하게 주고받다가 먼저 들어가 봐야 하는 친구를 보내고 저도 학원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다행히도 즐겁습니다. 원래 제가 아이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학원 애들이 착한 덕에 제가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인 아이들이었다면 저도 분명 두 손 두 발 다 들었겠지요. 물론 가끔 지칠 때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애들에게 질려서 지치는 것이 아니라 제 체력이 바닥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보다 체력이 많았을 때는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던 것들도 체력이 바닥나면 퉁명스럽게 대꾸하게 되더군요. 친절함은 체력에서 나온다는 말을 절절히 공감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기 위해서도 체력을 길러야겠습니다.   


시간은 금세 흘러 어느덧 퇴근할 시간이 됐습니다. 해는 거의 저물었고 하늘은 어두운 보랏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맘때쯤 일을 마치는 걸 아는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와 언제쯤 집에 오냐고 제게 묻기에 저는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갈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오는 길에 우유 좀 사 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버지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녁이라 그런지 퇴근길은 출근할 때보다 더 추웠습니다.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아서 지금 복장으로도 견딜 수 있었지 만약 세찬 바람이라도 불었다면 저는 택시를 타고 집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저는 한순간이라도 따듯하게 있고 싶은 마음에 지하도를 이용했습니다. 집 근처 지하철역에는 근사하게 정돈된 지하도가 있는데, 저는 몇 가지 이유를 들며 이곳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따듯한 공기로,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공기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나, 미술전시라든가 조형물이 있어서 눈호강을 하며 걸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점이 그 이유지요. 그래도 해와 구름이 근사해서 눈에 좀 더 담아두고 싶은 하늘이라면 지상으로 간답니다. 그런 하늘이라면 짓궂은 날씨도,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도 기꺼이 즐길 수 있으니깐요.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아버지에게 말했던 예상 도착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저를 기다린다고 저녁을 아직 못 먹고 있는 것 같던데 발걸음이 급해지네요. 미안한 마음에 오래된 컨버스 운동화를 부지런히 움직여 봅니다. 보도블록의 서늘한 기운이 운동화 밑창을 통과해 발바닥에 그대로 느껴집니다. 마치 냉장고를 신고 걷는 기분이네요.


지각은 했지만 우유는 빼먹지 않고 샀습니다. 늦었는데 이것도 까먹으면 면목이 없으니깐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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