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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감 Feb 28. 2021

열세 번째 수필

제주도 여행기 #2

- 화요일 21.02.09

 

이튿날의 해가 떴습니다. 사실 해가 뜬 지는 한참 됐고 우리는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의 온기에 잠이 깼습니다. 새벽의 여운은 숙취로 남아 무겁게 몸을 감싸고 있어 침대를 벗어나기 참 어려웠습니다. 시침이 열한 시 부근까지 온 걸 보고 '더 이상 게으르면 안 돼'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듯 타일러 겨우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일찍 나갈 준비를 마친 저와 다른 친구 한 명은 나머지 두 명이 씻는 동안 숙소 근처를 산책했습니다. 애월중학교 바로 옆에 있던(중학교 맞은편엔 애월 초등학교도 있었습니다) 저희 숙소는 앞으로는 넓은 밭이 펼쳐져 있고(잘 모르지만 녹차 밭일 것 같습니다) 뒤로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바다를 두고 있었습니다. 저랑 친구는 터벅터벅 바다를 향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춥지는 않았고, 작은 배들이 드문드문 정박해있었습니다. 저 멀리 등대도 있군요. 해변이라기보다는 항구에 더 가까웠지만 조용하게 굽이치는 바다를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내륙지방에 사는 저로서는 바다는 늘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니깐요.


(아마)녹차밭, 그리고 애월 바다


30분 정도 밖에 있다가 돌아오니 이제 전원이 나갈 채비를 마쳤습니다. 슬슬 배도 고파서 곧바로 점심을 먹기 위해 한림읍으로 향했습니다. 장소를 선정하는 최우선 기준은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 근처에 있는가, 였습니다. 오늘 저희는 점심을 먹은 뒤 해가 떠있는 협재의 바다를 구경하고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새별오름을 오를 겁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협재로 돌아와 해가 지는 바다를 눈에 담고 저녁을 먹은 뒤 밤하늘의 별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는 일정을 구상해놨습니다.


그래서 점심도 협재 해수욕장 부근에서 먹었습니다. 메뉴는 돈가스였는데 '제주도까지 가서 무슨 돈가스야' 이러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아니 우리들은) 돈가스를 무척 좋아하고 또 안 먹은 지도 오래됐기 때문에 적절한 메뉴 선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명이서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의 장점은 역시 다양한 메뉴를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네 명이서 서로 다른 메뉴 5개를 시켜 깨끗하게 비우고 나왔습니다. 평소 먹던 돈가스보다 비싼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만한 금액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한 끼였습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저희는 협재 해수욕장으로 갔습니다. 아침에 본 애월의 바다는 진하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두꺼운 청록색이었다면 이곳 협재의 바다는 바닥까지 보이는 투명하고 밝은 에메랄드 색이었습니다. 지금 글을 쓰며 그때 찍은 사진들을 죽 훑어보고 있는데, 눈에 담기 벅찰 정도로 색이 영롱합니다. 무척이나 이국적인 바다가 제주에는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사진 속 저희 머리는 세찬 바람 때문에 엉망진창입니다. 기껏 신경 써서 매만진 머리가 볼품없이 흐트러진 것을 보니 우스꽝스럽네요.


낮의 협재 바다


한참을 그곳에 있다가 저희는 새별오름으로 이동했습니다. 몸을 움직이기 좋아하고 등산을 좋아하는(저는 아닙니다) 두 사람이 제안한 것으로 처음에는 한라산을 등반하자는 것을 제가 기어코 만류하고 타협해 이곳 새별오름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봤을 때는 '음, 할만하겠는데?' 싶었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건 금방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진입로는 완만해서 문제없이 오를 수 있었지만 등산로가 꺾이는 것을 기점으로 경사가 가팔라졌습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종아리가 지끈거렸습니다. 올라도 올라도 정상에 다다를 기미가 안 보였는데, 한라산을 가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나마 운동화라서 피로감이 덜했지만 구두를 신고 온 친구가 무척 고생했습니다. 그 친구도 저와 같은 '반(反) 등산파' 였는데 본인도 제주도에 와서 등산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요. 친구는 전날 먹은 술 때문인지 속도 좋지 않아서 더욱 고된 산행이었을 것입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그간의 고생을 보답하는 듯 쾌청했습니다. 이렇게 탁 트인 공간이 얼마만인지. 저 멀리 지평선까지 막힘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제법 유명한 오름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저희와 함께 있었습니다. 원래 이곳은 빽빽이 채운 억새풀로 유명한 곳이라 들었지만 이때는 말끔히 밀린 민둥산이라 다소 황량하게 느껴졌습니다. 만약 억새풀로 가득한 새별오름을 기대하고 왔다면 서운했을지도 몰랐겠네요.

 

새별오름 정상


이후 저희는 오름을 내려와 협재 해수욕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해수욕장 근처의 카페에 들어간 것이 5시쯤이었는데 일몰 예정 시각인 6시 10분까지 저희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방문한 곳은 3층이나 되는 큰 카페였는데 커피뿐만 아니라 차와 칵테일까지 메뉴에 있었습니다. 어젯밤에도 먹었고 또 오늘 밤에도 술을 먹을 예정이니 이번에는 건강한 기분이 드는 차로 주문했습니다(이제 와서 말하지만 사실 제 입맛에 맞진 않았습니다). 카페는 한층 한층이 층고가 높아서 개방감이 무척 상쾌해 새장을 탈출한 새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카페의 1층부터 3층까지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이름 모를 와인으로 가득한 1층의 선반과 볕이 따듯하게 내리쬐고 있는 2층의 목재 테이블, 그리고 창백한 색의 3층 유리천장까지. 그렇게 바쁘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금세 해는 뉘엿뉘엿 기울었고 카페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일몰을 보기 위해 3층 테라스로 모였습니다.

 


옅은 하늘색 도화지에 노란 물감을 흘렸습니다. 경계는 점점 더 붉게 번져 주홍색으로, 보라색으로, 회색으로, 그리고 남색으로 칠해졌습니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그 잔향만이 지평선에서 남을 때까지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이때 본 하늘이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가져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고 당시에는 생각했습니다. 금오름에 가기 전까지는요.


해질 무렵 협재 바다


저녁을 먹고 8시쯤 저희는 금오름에 도착했습니다. 원래는 입구에 차를 주차시키고 정상까지 걸어 올라갈 예정이었지만, 차에서 내리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개만 들었을 뿐인데 수많은 별들이 시야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볼 수 없는 하늘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도심의 불빛에 자리를 빼앗긴 별들이 이곳에서는 원 없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무서울 만큼 어둡고 적막했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런 걱정은 사소한 것이 됐습니다. 코끝이 빨개질 정도로 추웠지만 고개가 뻐근해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협재의 바다와 금오름의 밤하늘을 한 가득 담고 저는 돌아왔습니다. 저의 제주는 이렇게 또 다채로워집니다.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저를 반겨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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