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과 미용실 - 2020.12
보통 미용실은 한 달에 한 번, 용돈을 받는 주기와 비슷하게 가고 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머리가 슬슬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4주 혹은 5주 정도 간격으로 머리를 자르려고 한다. 작년에 머리를 기르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가 미용실을 가장 오랫동안 방문하지 않은 시기로, 약 6개월 정도 머리를 방치했었다. 6개월쯤 되니 귀는 머리카락으로 완전히 덮였고 뒷머리는 어깨선에, 앞머리는 인중까지 닿아있었다. 옆머리나 뒷머리는 아무리 길어도 지저분할지언정 불편한 건 없었다. 하지만 앞머리의 경우는 달랐다. 실오라기 같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차지하는 것은 엄청나게 거슬리진 않아도 은근히, 묘하게 신경 쓰였다. 또한 앞머리가 길어지니 안경알이 쉽게 지저분해졌다. 분명 이마의 유분이 머리카락에 묻고 그것이 안경알에 묻는 순서일 텐데, 잘 닦아줘도 어느새 뿌예지기 십상이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미용실에 어머니가 동행했다. 어머니는 학교 규정에 맞는 머리를 준수해야 한다며 항상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미용사에게 요구했다. 어머니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니라며,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제발 길게 남겨달라고 미용사에게 간청했지만 미용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할 뿐이었다. 어머니가 앞에 있는데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 미용사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그때의 나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미용사에게도 서운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실제로 당시 우리 중학교는 두발 규정이 있었고 규정보다 머리가 긴 학생은 등굣길에 학생주임 선생님께 지적을 당하고 일정기간 내에 머리를 정리해와야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말한 것만큼 짧게 자를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창 멋 부리고 싶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민감한 사춘기였던 나는 미용실에 가는 순간이 무척 괴로웠다. 볼품없이 짧아진 머리카락을 보면 속상할 것이 불 보듯 뻔해서, 머리를 자르고 나서 한동안은 거울을 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보기 좋게 머리가 자랐다 싶으면 어머니는 미용실에 갈 때가 된 것 같다며 다시 나를 미용실로 끌고 갔다. 절망 그 자체.
그런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나도 고집이 생겨서 어머니와 함께 미용실에 가지 않고 무조건 혼자서 갔다. 여느 때처럼 미용실을 갔는데 그날따라 변화를 주고 싶어 평소와는 다르게 파마까지 요구했다. 한 시간 뒤, 거울 속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적지 않은 돈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왠지 자신감도 생겨서 괜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미용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당시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마주쳤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있는 바람에 대화를 주고받을 새도 없이 스쳐 지나갔지만, 친구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가리키는 것은 짧은 순간에도 알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라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예민하셨고, 나는 나대로 어른에 대한 반항심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우리 사이에는 항상 날카로운 공기가 도화선처럼 흐르고 있어서 언제 불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파마를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어쩌면 나는 이와 같은 안타까운 결말을 각오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어머니가 분노할 것을 알고도 반항심에 저지른 어리석은 선택이었다고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머리를 본 어머니는 당장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풀고 오라고 했다. 비싼 돈 주고 한 머리이고 또 마음에 들었던지라 나도 버티고 들었다. 그럴 수 없다며, 싫다고 성질을 부려봤으나 끝내 아들은 어머니를 이길 수 없었고 파마를 한지 두 시간도 안돼서 파마를 풀러 다시 미용실에 갔다. 미용사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좀 전에 파마를 받은 손님이 다시 와서 파마를 풀어달라니. 속상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용실을 나왔다.
다음날, 학교에서 마주친 친구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야, 너 머리 하지 않았었냐?”
나도 몰라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