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니트를 지켰던 판매원
몇 년 전 나는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집 소개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무려 지상파.
정말 가문의 영광이었다.
보잘것없던 내가 TV에 나오다니,
믿을 수가 없어 볼을 여러 번 꼬집었다.
힘들었던 세월이 길어
할 이야기는 많지만 아쉽게도 입을 옷은 없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오랜만에 백화점으로 향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맨날 집에서 늘어난 티셔츠에 쫄바지만 입고 살았더니
뭘 골라야 할지, 뭐가 어울릴지도 모르겠었다.
사실 마음에 드는 옷은 10만 원이 훌쩍 넘어 돌아섰다.
그렇게 백화점을 몇 바퀴쯤 돌았을까.
가격도 적당하고 색이 고운 핑크색 니트를 발견했다.
그때가 설 연휴가 시작하기 전전날이라 백화점에 사람도 많았고
물건이 많이 판매가 된 모양이었다.
판매하는 사람은 점장이었는지 카운터에서 포스 기를 보고 있었고
나는 “저기요, 이거 새 상품 있나요? 이거 부탁드려요.” 했다.
그런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거 하나 남아서 주문해 드릴게요.” 했다.
나는 내일이 촬영이라 급해서
“그럼 이걸로 그냥 살게요. 니트라서 사이즈가 있는 걸까요?
보풀이 있으면 그것만 정리 부탁드려요.”라고 말했다.
표정이 뚱한 게" 그냥 주문해 드릴게요" 하는 것이다.
그러더니 “그런데 고객님,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이거 44~66 사이즈까지 입을 수 있는데요.” 했다.
나는 니트를 이리저리 보다가 답변을 놓치고
보풀을 발견한 곳을 가리키며
“이것만 정리해 주시면…” 하는 순간,
“이거 그렇게 잡으시면 안 되세요. 그리고 사이즈 안 되실 것 같은데요.”
순간,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깟 것도 못 살만큼 없어 보이나?
내가 이깟 것도 안 맞을 만큼 뚱뚱한가?
그 사람은 나에게 그 옷을 팔고 싶지 않은 듯했다.
기분이 너무 상했다.
뭐 이런 이상한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어찌 됐건 하나라도 더 판매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산다고 하면 오히려 반가워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명품 매장도 아닌 그 브랜드라고 하기도 뭐 한 곳에서
이런 개무시를 당하다니.
오히려 내가 “알아서 입을게요, 신경 끄세요.” 하면서
오기를 부리고 싶을 정도였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무안하게 얼굴이 달아올라
큰아이 손을 잡고 나왔다.
결국 그날 나는 아무것도 사지 못했고
촬영 날, 평소 오래 입던 낡은 셔츠를 입었다.
그래도 나는 세탁 박사니까 뽀얗게 세탁해 둔 셔츠는 화면발이 잘 받았다.
그러고 한참 지난 후에 살만해서 투자했다기보다
나도 좋은 옷 좀 입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어렸으니까 조금 저렴해도 되었지만
이제 나이가 차니 옷장에 어디 참석할 때 입을 게 없어서
한숨 푹푹 쉬는 것보단 미리 나를 잘 갖추자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리고 또 한참 지난 지금,
마케팅이 뭔지 이제 좀 알 것 같은
그 핑크 니트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알겠다.
다다음 날부터는 설 연휴라 입고도 안 되는데
눈에 띄는 그 색 고운 핑크 니트는
지나가는 손님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디피 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래야 그 옷을 보고 매장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래서 나에게 판매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를 무시한 건 그 점장이 아니라
가격택만 연신 들여다본 나의 자격지심 아니었을까.
그때 무시당한 게 열받아서 쫙 빼입고
그 매장에 갔다.
젠장… 점장이 바뀌었더라....
보여주기식 허세는 내 팔자가 아닌가 보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