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uld you like a cup of tea?

홍차

by 다른디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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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동생이랑 셋이서 마카오 자유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이지만 모녀 여행은 처음이라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마카오는 면적이 좁아 걸어 다니기 충분했고 50대 초반이었던 엄마도 걸어 다니기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관절염 때문에 고생 중이었던 엄마는 오래 걷는 게 힘에 부쳐 종종 걸음이 뒤쳐졌다. 우리는 우리만의 첫 해외여행을 조금 쉬엄쉬엄 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휘황찬란한 호텔 옆에 또 반짝이는 호텔이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어서 어디에서든 쉽게 쉴 수 있었다. 밖은 습하고 더웠지만 호텔 안은 쾌적하고 호텔 내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우리는 그중 한 호텔에서 애프터눈 티세트를 시켜서 마셨다. 그때 홍차를 처음 접했다. 그때 마셨던 홍차의 맛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티컵과 소서는 파스텔 물감으로 하늘을 그린 것처럼 예뻤고 티푸드도 상큼한 샌드위치와 달콤한 디저트로 구성되어 정말 맛있었다. 그 후로 홍차는 내 친구가 되어 주었다.


홍차를 우리는 시간이 꽤 좋았다. 나름의 소꿉장난처럼 재미도 있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떨어지는 걸 보고 있는 그 3분이 좋았다. 샤르르 내려오는 그 소리가 귀에 들리면 시끄러운 사방이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멍하니 바라만 보았고 어느 날은 울기도 했다. 그렇게 곁을 내주었다. 날씨마저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날, 마음이 다 쓴 비누처럼 흐물거리는 날이면 스트레이트 차를 마셨다. 다즐링 3g에 물을 좀 넉넉하게 400ml 정도 넣고 따뜻하게 우리면 샤인 머스캣 향이 은은하게 난다. 코 끝에 향이 스치고 찻잔이 입에 닿으면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된다. 또 어느 날은 높고 푸른 하늘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나도 맘껏 맑아지고 투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럴 땐 블렌딩 된 차를 선택해서 마신다. 로네펠트 아이리쉬 위스키 크림 3g의 찻잎을 준비하고 300ml의 물을 넣고 3분 우린다. 달콤한 코코아 향과 은은하게 퍼지는 위스키 향이 기분을 더 좋게 만든다. 코 끝을 감싸는 풍부한 향이 푸른 하늘을 둥실둥실 떠다니게 한다. 이럴 땐 차 한 잔으로도 천국을 맛 본 기분이 든다.


차 한잔으로도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삶이 어떨 땐 축복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일찍이 홍차를 알지 못했다면 누리지 못했을 시간과 추억들. 차를 알게 되면서 마음의 넉넉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 지 알게 되었고 더 깊게 차를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티 마스터 과정을 수료하게 되고 자격증도 땄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고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빨리 뛰었던 카페인 민감증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차의 계절은 365일 돌아온다. 울그락 불그락 365일 변하는 감정 기복이지만 그때마다 차 한잔을 곁들 수 있어서 나는 분명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이 모든 걸 나눌 수 있는 차우(茶友)만 있다면.


"Would you like a cup of tea?"









[홍차]

차나무의 어린잎을 발효시켜서 녹색을 빼내고 말린 것

끓는 물에 넣으면 맑은 홍색을 띠고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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