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각모음 #11 밝은 곳을 봐야 사라지지 않지.
도로에 접해있는 편의점 문 앞에는 사람들의 인적이 드물었다. 편의점 테이블 위에 누가 마시다 말고 두고 간 맥주가 그대로 놓여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장이 보면 또 한마디 하겠는데라고 생각은 하지만 몸은 그대로였다. 식품 냉장고 앞에 오늘 배송된 입고된 물품들이 상자에 담긴 채 쌓여있다. 원래대로면 지금 바로 정리해둬야 할 물건들이었다. 손님 오기 전에 해야 하는데... 움직이지 않는 몸 대신 머릿속만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 낮에 K를 만났다.
우리 한 번 만나야 하지 않느냐고 넌지시 이야기를 했던 참이었다. 거의 보름 만에 하는 데이트이긴 했다. 만난 지 이제 6개월째라 자주 데이트를 하고 싶었는데 너무 바빴다. 오늘은 오랜만에 낮 근무가 없어서 K를 만나기로 했다.
K는 파스타를 좋아했다. 처음 데이트도 너무 뻔한 파스타였다. K가 친구들과 종종 다닌다고 했던 연희동에 있다는 파스타집은 대기가 길다고 했었다.
"거기 웨이팅이 너무 힘들어. 음식은 가끔 생각나는데.. 너무 유명해져 버렸어."
자주 갈 수가 없어서 아쉽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두었다가 그 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보통은 함께 만나서 움직이는데, 오랜만이니 먼저 가서 웨이팅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 입장을 하기 위해서는 일찍 가야 할 것 같았다. 서울에 살지 않기 때문에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마을버스도 한 번 타야 하는 꽤나 복잡한 길이었다. 식당에 도착해서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두고, 접수되었다는 문자를 확인한 뒤 근처 커피숍을 찾았다. 조용하고 유명한 동네라서인지 카페가 많았다. 수 많은 개인 카페를 지나서 가격이 저렴할 것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를 골라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차갑고 연한 커피를 마시며 숨을 골랐다. K가 기분 좋을 때만 보이는 그 표정을 떠올리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에 만나고 싶었는데... 그런데... 오빠."
식당에는 테이블이 여덟 개 밖에 없었다. 2인석인 우리 테이블은 식당의 중간에 있는 자리였다. 모두 작은 목소리로만 얘기하며 식사를 하거나 음식을 기다리고 있어서 식당 안은 무척 조용했다.
하나같이 맛있는 파스타를 먹으며 웃음기 있는 얼굴들이었다. 그렇게 기다려서 먹어도 기쁜 표정을 지을 만큼 소문대로 정성이 담긴 맛있는 파스타였다. 전부 해서 스무 명 남짓한 식당의 손님들 중 표정 없는 얼굴을 한 건 우리뿐이었던 것 같다.
"일단 먹자. 배고프잖아. 너 아침 안 먹었을 거 아냐."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K의 입에 돌돌 말린 파스타를 한 입 넣어주고는 앞에 놓인 접시의 파스타를 묵묵히 씹었다. 아닌 게 아니라 블로그에서 본 소개글처럼 생면으로 만든다던 파스타의 깊이 있는 맛이 정말 맛있었다. 그러자 K도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식당 분위기가 생각보다 차분해서 우리는 거의 말없이 식사를 했는데 음식은 너무 맛있다보니 접시를 싹 다 비우고 말았다.
식사를 마친 뒤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한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말했다.
"아까 하려던 말 지금 해."
"아니야. 별 얘기."
"뭐 할 말 있는 거 아녔어?"
"응 아냐. 오빠 우리 커피 마시러 갈까?"
그렇게 우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데이트를 했다. 근처 카페에 가서 나는 차가운 커피를 한 잔 더 마셨다. 저녁엔 친구를 만나야한다는 K를 일찍 보냈다. 나도 어차피 알바를 하러 가야한다. 그런데 어쩐지 목에 걸린 재채기가 갑자기 사라진 듯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편의점에 출근해서 K의 말이 계속 생각이 났다.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을까? 머릿속이 조금 복잡했다. 멍하니 카운터에 앉아 있는데, 편의점 유리문 앞에 웬 여자가 서있는 게 보였다.
뭐야..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갈 거면 가지 왜 입구를 막고 섰어 했는데 그 뒤 쪽으로 남자가 하나 다가오더니 몇십 초 혹은 일분이 넘는 시간 동안 남자가 그러고 서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었다. 같이 온건가?
곧이어 남자가 한 마디를 하는 것 같더니 곧바로 여자가 쿵-하고 자기 머리를 냅다 유리문에 갖다박았다. 왜 저래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 남자가 먼저 편의점에 들어서고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그 뒤로 방금 유리문에 자기 머리를 박은 여자가 금방 따라 들어왔다. 뭐야 이 둘...
오늘따라 이상한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 둘은 냉장고 앞에 서있는 것 같았다. 조금 후 여자가 먼저 카운터로 와서는 대뜸 새로 나온 콜라보 맥주를 찾았다. 요즘 인기가 많아 들어오는 족족 나가는 맥주였다. 냉장고에 있는게 전부라고 설명하자 실망하는 듯한 얼굴을 하곤 냉동고에서 봉지 얼음을 집어오더니 계산은 안 하고 쭈뼛쭈뼛 거리고 있었다. 그 뒤에 아마도 오늘의 마지막일 콜라보 맥주를 든 남자가 있었다. 오호.. 저쪽이 승자였군. 가까이서 보니 제법 잘생겼다. 어쨌든 귀찮으니 빨리 보내버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분주한 여자를 무시하고 남자에게 말했다.
"계산하시겠어요?"
키도 큰 남자는 여자의 어깨 위에서 카운터를 향해 맥주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같이 계산해주세요."
'이거..? 저 여자꺼?'
여자도 놀란 얼굴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이렇게 작업을 거는 듯한 남자가 제법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까의 우울한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카운터 앞의 남녀를 보는 내 눈빛이 빛나는 것 같았다.
{미지근한 매거진}에서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