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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Nov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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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각모음 #15. 하루는 둥글게 이어진다

 

아무 예고도 없이 일 년 만에 나타난 제이안.

일 년 만에 나타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 녀석이 또 나를 흔들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녀석처럼 예고 없던 빗방울이 한 방울 툭하고 그들의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둑.. 투두둑.. 쏴아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던가? 연우는 당황하고 말았다.

놈과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척 눈물을 닦아주던 제이의 다정했던 손길이 무색하게 난데없이 굵은 비가 쏟아져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여름이 오기라도 하는 건가.. 한여름 장맛비처럼 내리는 빗방울에 이미 제이의 옷도 연우의 붉은 모자도 속수무책으로 젖기 시작했다. 


우산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연우의 손에는 그저 얼음이 담겨있는 편의점 봉지가 덩그러니 쥐어져 있을 뿐이었다. 다시 횡단보도만 건너면 편의점이었지만 연우는 고민할 새도 없이 집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가야겠다 집에.


조금 전까지 오늘 밤이 며칠처럼 느껴졌다고 연우는 생각했다. 그렇게 멈췄던 시간이 쏟아지는 비와 함께 빠른 템포로 흐르는 것 같았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어. 여길 벗어나서.

 

영화의 한 신을 넘기 듯 오늘 제이를 만난 게 어쩐지 홀가분한 마음이 드는 연우는 발걸음을 급히 집으로 옮기려고 했다. 집까지는 횡단보도를 한번 더 건너야 하니 서둘러 뛰어야겠다고 생각한 연우의 소매를 제이가 붙잡기 전까지는.






"이대로 가려고?"


여전히 연우에게는 해석이 어려운 알 수 없는 표정의 제이가 얼굴에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물었다. 흔들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응. 너도 집으로 가. 이거 놓고. 오늘..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



연우는 상황을 마무리하려 스스로 제법 단호하다 생각하고 말했다.




"얘기 좀 더 해. 너 지금 비 맞으면 감기 걸려. 비 그칠 때까지만 근처에 어디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


"집에.. 가야 돼. 얼음 녹잖아."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본 건데... 이대로 가는 건 아니지.

아! 저기 술집 열었다. 비 맞고 집으로 가는 거보다 빠르겠다. 괜찮지? 가자! 연우야."




연우가 손에 든 게 얼음인 걸 생각이나 하는 건지 연우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있는 건지 제이는 이미 연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놈은 여전하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연우는 제이가 하자는 대로 이끌려 가게로 들어갔다. 



평일 저녁이라 대부분의 테이블이 비어있던 맥주를 주메뉴로 하는 술집의 주인이 반기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어? 밖에 비 오나 봐요? 오늘 비가 온다 했었나? 아이고 비를 제법 맞으셨네. 

수건 좀 드릴게요."


테이블이 몇 개 없고 작은 가게라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았는데, 바깥을 볼 수 있는 창가 자리지만 카운터와 거리는 채 삼 미터도 되지 않았다. 주인이 건네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연우는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저 보드카 토닉 한 잔으로 조용히 잠들려던 저녁이었는데..



"연우야. 맥주 마셔. 어차피 집에 가서도 한 잔 하려던 거잖아. 지금도 라거 좋아하지?

사장님~ 여기 스텔라 생맥 두 개 주시고요. 안주는 좀 더 보고 시킬게요. 

뭐 먹을래 연우야. 저녁은 먹은 거지?"



앞에 앉은 녀석은 아까 내가 눈물 흘린 걸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연우는 멋쩍어 웃음이 났다. '그래. 내가 혼자 심각했다. 넌 늘 이런 식이 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그럼 나 나초 먹을게.  사장님~~ 여기 나초도 하나 주세요~"






도로에 비는 곧 그칠 거라던 제이의 말과 달리 그칠 기미 없이 계속해서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제이의 근황과 연우의 푸념을 안주로 맥주도 계속 비워지고 있었다. 초는 제이가 그 사이 다녀왔다던 남미 어디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어느 순간 연우는 보드카 토닉을 마시려고 얼음을 산 게 맞다고 말했고 제이는 그럼 우리 보드카를 마셔야지~ 했다. 주인에게 혹시 보드카가 메뉴에 있냐고 제이가 물었고, 다른 손님이 없던 주인은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듯 메뉴에도 없던 보드카 토닉을 만들어주었다. 

여행과 음악을 좋아한다는 주인이 자연스레 함께 자리했고, 둘은 아무 상관없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누구에게나 호감형인 제이는 어느새 주인을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보드카가 한 잔... 두 잔... 계속해서 비워졌다.

가게 안에는 주인의 취향이라는 Keith Jarrett Trio의 라이브 연주가 흘렀고 연주는 마치 재즈바에 와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연우는 기분이 들떠버렸다. 오늘 밤이 너무 현실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제목과 달리 제법 빠른 템포의 Late Lament에서 All the things you are로 음악이 넘어갔다. 차 소리와 빗소리로 시끄러웠던 도로의 소음은 술기운에 음악소리에 이야기 소리에 묻혀 점점 아득하게 들렸다.




연우의 특별한 가을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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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근한 매거진 }에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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