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조각모음 #19 각인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은 사람을 같은 강의를 듣는 다고 해서 연우가 알리가 없었다. 연우는 주변을 잘 살피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얼굴(남자는 제법 괜찮게 생긴 얼굴이었다.)이면 한번쯤 눈에 들어왔을 법도 한데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짜증은 나지만 같은 수업을 듣는다고 하니 스스로의 기억을 믿지 못하며 흘금거리며 남자를 다시 한번 봤다. 남자는 키가 큰 편이었고, 나이도 또래로 보였다.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우는 떠올리기를 포기하고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어쨌든. 전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그쪽이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도 정말 모르겠네요. 이거 어쩌실 거예요?"
"제이한이야. 인사 정도는 하는 게 어때? 지연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뭐야 이 사람.'
그러니까 꽤 오랜만에 연우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참이었다. 연우는 수업과 수업 사이. 아직 할 일은 있지만 약간의 대기상태인 그 시간을 좋아했다. 특별한 뭔가가 있다기보다는 어쩐지 하루 일정을 문장으로 적는다면 그 시간은 아마도 진짜 쉼표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시간에는 가급적이면 누군가를 마주치지 않을 법한 장소를 찾아다닌다.
그런데 남자는 딱 그 쉼표에 나타나 연우의 시간을 망쳐버렸다. 상대가 누구 건 상대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손목의 시계를 흘끗 보았다. 아직 수업까지는 시간이 있다. 이대로 있기도 싫고 남자의 의도는 당연히 모르겠고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음료 같은 거 쏟은 셈 치면 된다. 말을 섞을수록 연우는 자신의 시간이 희석되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으면 어떡하나 잠깐 고민하면서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연우의 행동을 남자는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대로 일어나 테이블에서 멀어졌다. 딱히 어딜 가야 할지 생각은 나지 않았다. 남자는 붙잡지도 따라오지도 더 이상 말을 걸지도 않았지만 시선을 거두지도 않은 채였다.
'이상한 사람이야.'
대체 뭐야.. 하는 기분으로 연우는 다음 강의실 방향으로 향했다. 갈 곳을 생각했다기보다 그저 일정을 따르는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다. 사실 그런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과 달리 사실 연우의 머릿속에는 '왜'라는 단어가 뭉게뭉게 자리 나고 있었다. 목에 걸린 작은 가시 같이 해결되지 않은 의문은 호기심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쉼표의 시간이 어느새 물음표로 채워지고 있는 걸 연우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날의 기억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제이한이라는 남자를 다시 본 건 강의실에서였다. 대중음악의 이해. 역시 인기 있는 수업인 만큼 사람들로 넘쳐났다. 어디 앉아야 하나.. 고민하며 교단에서 먼 뒤쪽 창가 방향에서 빈자리를 찾던 연우의 눈에 그 남자가 들어온 거였다.
'뭐야. 거짓말은 아녔나 보네. 왜 그동안 안 보였던 거지?'
연우는 몰랐지만 마음속에 물음표가 조금 더 물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친구들이랑 얘기를 하던 남자가 연우를 향해 갑자기 팔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아냐. 나한테 그런 거 아닐 거야.'
"지. 연. 우! 여기여기~ 자리 비었어!"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 속에서 갑자기 날아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또렷한 형상으로 연우의 빨개진 귀에 박혔다. 연우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웃음은 본 적이 없었다. 오래된 절친이라도 만난 것 같은 세상에서 가장 밝고 맑은 그런 표정이었다.
'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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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 미지근한 매거진 }에서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