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같은 기지배, 노랑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랑이는 조그만 체구에 비해 지나치게 부른배를 가지고 있었다. 쓰레기를 뒤지다가 병이라도 옮았던 걸까? 아니면 우리가 주는 사료를 허겁지겁 먹고 과식을 해서 비만해지는 것일까..?
이런저런 걱정을 했지만, 특별히 동물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위급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 비만일 수도 있고.
게다가 녀석이 내 고양이라는 생각은 안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달여가 지날 즈음 노랑이 배는 눈에 띄게 불러왔다. 간이 많이 안좋아서 복수가 찬 사람을 본 적이 있어서 왠지 걱정이 되기는 했다. 계속 지켜보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우린 주변에 고양이를 키우던 친구들에게 문의했다. 그때만해도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는 어쩐지 약간 반려동물계의 비주류인 느낌이었고 그래서 많지도 않았더랬다. 어쨌든 문의한 결과 그들의 예상에는 '임신'이라는거였다.
임..신..? 임신이라니!?
그랬다. 노랑이는 '임신'을 했고 '만삭'인 것 같다고 했다.
노랑이는 제 몸과 곧 나올 제 새끼들을 의탁할 곳이 필요했고 우리는 '간택' 당한거였다.
그 귀엽고 사랑스럽던 몸짓, 표정, 애교는 모두 목적이 있었던 거였고 모두 녀석의 강력한 무기였던 것이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J와 나는 스마트한 척 검색을 해보았고, 일반적으로 고양이의 임신주기는 2개월남짓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 그러고보니 니가 우리 (정확하게는 J)에게 나타난 것도, 그 모든 행동(지금 생각하니 여우같은!)도 두 달새에 일어난 일이다.
게다가 더해서 우리는 길냥이가 한 여름 장마철에 길에서 출산하게 되는 경우 많은 확률로 새끼들이 죽게된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몰랐으면 그냥 넘어갔을까..?
이미 정이 들대로 들어버린터라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고, 왠지 영 불편했다.
한 번의 재계약을 거친 우리의 좁고 작은 신혼집은 거실 겸 큰방과 침실로 쓰는 작은방 그리고 주방, 얄팍해서 빨래나 널 수 있는 베란다 뿐이었다.
그 작디 작은 우리의 신혼집에 더 이상의 식구가 머물 곳은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착한 아이병에라도 걸린걸까!) 우리의 침실인 작은방에 입실시키는 수밖에...
그때까지만해도 순진했던 우리는 노랑이가 출산을 하면 예쁜 아기고양이들은 우리가 노랑이를 데려온 것 처럼 곧 좋은 주인을 만나 떠나게 될 것이고, 이미 집에 들인 순간부터 가족이 된 노랑이만을 우리집에 머물게 할것이라고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꿈도 야무지단 말은 이럴 때 쓰는거였다.
그렇게 극적으로 작은 방(정확히는 우리의 신혼집 침실)에 산실을 꾸민 노랑이는 정확하게 3일 뒤 똑같이 노란 반점이 콕콕 박힌 귀여운 치즈 새끼 고양이들을 낳았다.
노랑이가 새끼를 낳을 것 같은 예감이 있었던건지, 다른이유가 있었는지 벌써 몇 년이 되어 잘 기억나지 않지만(늙어서가 아니다) 그 날 나는 연차를 내고 요런저런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어른들말씀이 개와 고양이는 반대라더니 어쩜 정말 노랑인 소리 한 번 안내고, 네 마리의 아기고양이를 낳는거였다.
첫째냥이가 나올랑말랑하는 동안에 노트북을 산실근처로 옮겨두고 네이트온 창을 열어둔 채 주변 고양이 집사들에게 실시간으로 헬프미를 외쳤다. 나 이제 어떡해야하냐고! 문득 어릴 때 집 마당에서 키우던 바둑이가 새끼를 낳았던 것과 산후에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준 기억을 떠올렸다. 근데 바둑이가 새끼를 낳을 때엔 엄마가 어떻게 해줬더라....고양이도 똑같나? 다르나?!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나는 조금 무서웠다. 나는 피도 무서운데....네이트온 대화창은 소독한 가위를 준비해라! 명주실이 있어야된다! 수건을 준비해라! 이래라저래라하는 코칭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곧 소리 한 번 안내고 첫째를 낳고는 탯줄이 달린 채로 새끼를 달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노랑이를 보니 새끼를 깔고 앉을 것만 같은 끔찍한 생각이 들어 미리 준비해둔 실로 탯줄을 묶고 소독해 둔 가위로 탯줄을 잘라주었다. 휴우.. 해냈어..홀로 뿌듯함에 돌아보니, 노랑인 쏟아져나온 태반도 이미 처치했고 그 사이 이미 두마리의 새끼를 더 낳아놓고 태반도 핥아서 벗겨주며 알아서 잘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초보 조산사의 실력이란..
그렇게 조용하고 은밀하게 총 네 마리의 제 엄마를 꼭 닮은 노란 새끼냥이들이 탄생했다. 귀여워!
무사히 출산을 마치고 '고양이' '산후조리'를 검색해보았다.
수많은 레시피가 있었지만, 닭고기나 북어를 끓여주라는 언급이 많았다.
마트에 가서 닭안심을 사다가 양념 없이 폭폭 삶아 고기는 식혀서 잘라주고, 육수는 간 없이 그릇에 덜어주었다. 엄마의 마음이 이럴려나. 나의 정성을 알아주는 듯 너무 맛있게 먹어주는 노랑이를 보고 있자니 어찌나 뿌듯하던지.. 서른초반에 친정엄마의 마음을 겪은 기분이었다.
아마도 집사는 이렇게 만들어지기도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