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혹은 어떤 생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와 같다.
J와 둘이 앉아 '자, 이제 이름을 지어보자'해서 지었는지 얘기중에 지은건지 그 시작이 뭐든지 그것까진 사실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어쨌거나 벌써(!) 10년이 지나버린 일인 것이다.
어쨌든 전혀 노랗지 않은 고양이에게 '노랑'이라는 엄청 대충 지은 것 같은(사실 급히 지은 것도 맞지만) 이름을 그냥 쓰는 것은 우리가 '노랑'이를 어떤 고양이나 그 고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우리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고양이 네가 가 알아듣건 말건 우리에겐 소중한 '노랑'이니까.
어린 왕자에서 정성을 쏟은 장미가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어 슬퍼하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내 비밀을 가르쳐 줄게. 매우 간단한 비밀이야. 뭐든지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밖에 없다는 이야기란다. 중요한 것은 절대 눈에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 네 장미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네가 장미를 위해 쏟은 시간이야.”
결국 우리에게 노랑이가 특별한 이유도 나와 J가 노랑이에게 쏟은 우리의 시간 때문이고,
우리와 노랑의 '관계'라는 것이 시작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노랑이의 예쁜 새끼 고양이 네 마리는 곧 눈을 떴고, 뽈뽈 방 안을 기어 다녔다. 우리는 이 생물들의 케어를 위한 구분이 필요했고, 그 도구로 '이름'이라는 것이 필요해졌다. 아. 그래서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우리와 그들 간에 관계가 시작된다는 신호였고 우리는 네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다 책임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심장으로 파고드는 얘네들에게 더 이상 마음을 침략당하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우리는 최대한의 방어기제로서 호칭은 부르되 가장 객관적이고도 거리감이 느껴지게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지어진 풀네임은 삐용 N호.
한참 어린 새끼 고양이들은 야옹이 아니라 삐용삐용거렸고, 그래서 우리는 '삐용'이라는 이름에 숫자를 옵션으로 해서 1-4호라고 부르기로 했다.
삐용 1호, 삐용 2호, 삐용 3호, 삐용 4호....
거리감을 두기에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당시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의 작은 집에 고양이 5마리는 말도 안되는 일이다. 정신 차리자. 그래서 나는 이름을 대충(?) 지어준 뒤 고양이를 입양보내기 위해 반려묘 관련 카페에 가입했다. 입양을 보내기 위해서 가입을 했건만. 나는 자꾸만 '고양이 잘 키우는 법'을 검색하고 있었다. 아냐. 이게 아니라고. 정신 차리자! 나 자식아! 미묘에 현혹되면 안 돼!
그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이름 대충 짓기 같은 그런 하찮은 행동들은 결국 큰 의미 없었다는 것을. 우리 집에서 태어난 생명에게 이미 나는 심장을 빼앗겨 버렸다는 사실을.
어쩌면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때 우리는 그 작고 예쁜애들에게 손도 대지 말았어야 했다.
정말 그랬다. 정말 노랑이와 그 가족을 객관화하여 구경만 했어야 했다. 아무것도 해주지 말고, 방바닥에 턱을 괴고 그 생명체들을 종종 관찰하는 행위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 집은 완벽하게 점령당했다.
심장도 빼앗겼다. 따뜻하고 잔인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