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해야할 일
글은 문자로 남긴 ‘기록’이다. 그리고 기록이란 것은 보여지기 위한 것을 전제로 존재한다. 혹자는 작자만 보기 위해 쓰는 것도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이미 글을 쓴 본인도 결국 독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읽는 이를 전제하지 않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조금 비틀면 좋은 글이란 ‘수용자를 만족시키는 기록’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이 정의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수용자의 만족’에 대한 명확한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가 필요하겠지만, 우선 ‘정보나 감각적 유희, 새로운 영감 등 정서적인 자극을 통해 flow(몰입)를 일으키는 상황’으로 약술해도 의미상 오류는 없을 것이다.
정리하면, 글이란 단어 속에는 이미 그것을 읽는 사람이 산정되어 있다. 드디어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다. Writing의 DNA 속에는 Reader라는 염색체가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글을 쓸 때 얼마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왜?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지 않았으니까.
수 천 년 동안 글이란 영역에서 중축을 담당한 문학 장르에 대해 우리가 배운 것을 되짚어보자. 시의 3요소는 주제, 운율, 심상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독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럼 소설이나 수필은? 주제, 구성, 문체. 다들 교과서에서 이렇게 배웠을 것이다. 시와 마찬가지로 주제(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들어가 있지만 독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렇다면 희곡은? 형식적으로는 대사, 지문, 해설, 내용적으로는 인물, 사건, 배경으로 나누고 있다. 역시나 오디언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요소라는 것은 그것을 이루는 근본 조건, 또는 필수적인 조건을 의미하는데, 문학의 존재 이유에 독자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문학은 태생적으로 양보할 필요가 없이 자란 외아들과 흡사하다. 타인을 괴롭힐 의도는 없지만 고민해 본 적이 없기에 하던 대로 하다 보니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처럼. 여기에서 우리는 문학이 사람들에게 덜 사랑받는(지금도 몹시 매우 사랑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가 당신에게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럼 내 글을 찾아온(또는 찾아올) 사람들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해야할까? 칙센트미하이는 flow에 빠지기 위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언급한다. skill(능력)과 challenge(도전 과제)가 서로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될 때 우리는 집중 상태를 지속한다고 한다. flow를 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해석 능력(skill)보다 어려운 콘텐츠가 주어진다면 불안감이, 그 반대라면 지루함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간극 조절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작은 힌트를 얻는다. flow를 위한 간극 조절을 위해서는 나의 ‘고객’이 누구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떠한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늘 귀를 쫑긋한다. 이는 시대를 막론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이에 반해 당신은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 당신의 독자가 어떻게 하면 flow에 빠지게 될지를 말이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가장 먼저 누구에게 말을 걸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당신은 누구와 이야기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