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마흔.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려왔던가. (여전히 세상사에 매일 정신을 빼앗겨 판단이 흐려지는 일이 잦은, 일상 자체가 늘 혹하는 ‘늘혹’이지만) 어찌되었건 드디어 중년의 반열에 들어섰다. 아쉬운 거라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서 지원하는 청년전용창업자금대출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 그것 말고는 너무나 완벽하고 이상적인 나이가 됐다.
그렇다고 인성이나 품격이 완성됐다는 말일 리가! 여전히 갈 길이 멀고, 나의 성숙 속도(m/s)는 모두가 공유하는 시간의 속도보다 더디다. 그렇지만 훌륭한 지인들을 보며 망양지탄의 마음으로 2022년을 오매불망 기다려왔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윌슨처럼 망연자실한 채 기다려왔다.
이쯤 되면 왜 굳이 배 나온 불통의 대명사인 중년 남성을 희망하는지 의문이 들 법하다. 이럴 때 시원하게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미 배는 더 어릴 때부터 나와 있었으니 그 부분은 자연스럽게 생략.
어쩌다 보니 서른 네 살에 비서관이 됐고, 서른 여덟 살에 공공기관 상임위원이 됐다. 또래 비슷한 연차의 직장인에 비해 제법 많은 권한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결재칸 위치가 이를 말해줬다. 자연스럽게 고위 공무원이나 유력 정치인을 만날 일이 많아졌다. 처음 나와 대면하는 그들의 첫 마디는,
“개성이 넘치시는 분인가 봐요?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시는 분인가 보다. 그렇죠?”
"패기를 보여주세요, 화이팅!"
대부분 이런 투였다. 젊은이를 바라보는 중장년들의 전형적인 태도. '청년'이라는 단어 속에 가둬놓고 편견으로 대한다. 신선하다는 말로 포장하지만 얕잡아보는 시선이 18% 정도는 함유되어 있다. 익숙하지만 그 불쾌함은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외쳤다.
‘나는 전문가로 여기 당신과 동등하게 앉아 있는 겁니다. 당신이 마케팅에 대해서 알아? 어? CPM을 낮추기 위해서 뭘 고민해야 하는지, 어떤 메시지를 써야 CTR이 올라갈 지 아냐고? 어?’
그러나 현실은 “좋은 선배님들 사이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로 마무리 짓는다. 그래야 싹수 있는, 전문성보다는 패기로 일하는 청.년.이니까. 반대로 내 옆에 '과거만 있고 현재가 없는' 어떻게 흘러흘러 알음알음 이곳에 온 중년 남성은 보호색을 띈 메뚜기처럼 아무 위화감 없이 잘 지낸다.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매일 책상에서 신문만 보고 있는데도.
그때 직감했다. 82%의 과장을 보태서 일의 결과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마흔이라는 선행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앞서도 얘기했듯이 내 배는 처음부터 나와 있었고, 머리 숱도 예전 같지 않다. 흰 머리도 잔디 밭을 잠식한 잡초마냥 제법 중년의 면모를 갖추었다. 예전처럼 열렬히 “나 열심히 해요. 성과를 잘 내요. 나 전문가예요.”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흰 머리와 불룩 나온 배를 먼저 내민다. 너무 비약 같다고?
마흔을 말하고 나서 클라이언트가 늘었다.
덧) 이 글의 초안을 읽고 한 선배가 공감을 한다면서 한 마디 보탰다.
"그래도 영웅씬 남자잖아요. '어린 여자'는 진짜... 으휴... 나도 이제 나이 먹어서 너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