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영웅 Nov 20. 2023

주제 파악과 모자의 함수 관계

Follow your fear

딱히 잘난 덴 없지만 그렇다고 못난 것도 없는 애매한 인생이다. 화려하게 주목 받은 적도 없고 되려 “아부지 뭐하시노?”라고 묻는 담임들 앞에서 움츠려드는 학창시절을 보내야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뭐든지 잘하고 싶었고, 잘난 애들에게 지기 싫어서 늘 온몸을 쥐어짰다. 야구선수 아비에게 물려받은 승부욕 때문. 사실 애잔한 인생이다.


마흔이 되어서 중간점검을 해보니 굳이 그렇게까지 살아왔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겠나 욕망이란 것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법. 나같은 흔남도 죽어라 노력하면 (설령 자신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부서져라 달리면) 잘하게 된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름의 작은 목표들을 이뤄가며 성장해가고, 이러한 양적 성장에 비해 갖춰지지 못한 인격이나 사회성을 늦게 채워가면서 질적인 성장까지 챙기며 살았다. 늦을 뿐 채우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온몸을 불사르고, 쉬면서 반성하기를 쉼없이 해왔다. 무쇠마냥 스스로를 담금질한 것. 내가 아는, 그리고 내가 가진 유일한 단단해지는 방법이었기에.


과할 수 있다. 아니 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적당’했다면 나의 삶은 ‘적절’했을까?


지금 계속 얘기하는 이 성장이란 게 단순한 부의 축적이나 권력의 쟁취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물론 그것들도 자리 잡고 있는 걸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내 안에는 조화롭고 싶은 욕망과 타인을 일으키고자 하는 욕구도 함께 작용한다.


그래서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일 지도. 그 증명이 잘난 체를 하고 싶은 것이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적당히 하고 타고난 기술로 포장하면 되니까. 그나마 포장지를 만드는 능력은 탁월하기에.


그러니 내가 가진 증명의 욕망은 나와 같은 성장충들에게 우리 같은 흔남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음으로 갈음할 수 있다. 옳고 그르고, 바르고 삐둘고를 떠나 태생이 그렇다면 그 안에서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야 하기 마련이기에. 이는 철저히 같은 욕망을 지닌 이들에게만 작용한다. 이를 갖지 않은 이들에게 이는 과욕으로 비칠 수도 있고, 실제로 헛된 노력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특히 가까운 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많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


내가 굳이 그들의 나태함(으로 보이는 것)을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에게 내 전력투구가 손가락질 받을 이유는 없다. 가끔 술자리에서 희희덕 거리며 쉽게 운으로 치부당할 만큼 대충 살지 않았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건 나 역시 아직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열폭한 지점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창피하기도 해서 이렇게 싸질러대는 것이다. 이렇게 풀어야 게워지니까. 남들 술 한잔 하며 털어내는 것처럼 글 한자 쓰고 털어내자. 나는 내일도 또 백화점 가서 모자 팔아야 하니까.


이 모자가 그런 모자입니다. 치열한 삶의 자세가 고스란히 반영된 영혼을 갈아넣은 모자입니다.

#그러니사야겠죠 #판교에서만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섹스도 하기 전에 이름부터 지어놓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