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주기다. 매년 추석만 되면 컨디션이 급 나빠진다. 감기 기운도 슬슬 있고.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떼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 해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를 조금씩 이해하고 용서하는 폭이 늘어간다. 억지로 하려고 할 때는 되지도 않던 것들이 그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절로 한 걸음씩 마음이 옮겨간다. 화해를 조금씩 하고 있다. 그 화해가 유쾌하지만은 않기에, 아직은 내 그릇이 작다보니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닌가 한다.
그나마 우리 부자의 화해에는 늘 '오죽 했으면'이 접두사처럼 덜렁 거린다.
20 여 년간의 병간호로 지친 어머니를 생각하면 '적절한' 때에 가셨지만 그저 아들로서는 아쉬운 것들 투성이다. 궁금한 게 너무 많고,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라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다.
얼마 전 사촌형으로부터 아버지의 예전 사진을 받았다. 필체가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 뒤에는 의미를 모를 부탁이 쓰여 있었다. 누구에게 왜 이렇게 쓴 것일까? 한 때 하드보일드 장르를 쓰던 웹소설 작가로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봐도 가늠이 되진 않는다.
그러다 문장 마지막에 "일본 원정을 앞두고 삭발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읍니다"가 쿡하고 박힌다.
야구선수로서 최대의 꿈이었던 국가대표 시합을 앞두고 불미스런 일로 일본에 가질 못했다. 그렇게 그는 야구선수로서, 국가대표로서의 삶을 스물 한 살이란 어린 나이에 포기해야 했다.
이 한 문장이 내게 '오죽 했으면'을 또 발동시킨다. 그의 치기와 분노가 남은 그의 삶을 휘감지 않았을까? 지금 떠올려보면 희미한 기억 속에 있던 그의 웃음 뒤에 쓸쓸함은 너무 어린 나이에 꿈을 포기해야 했던 탓이 아니었을까 측은지심을 부려본다.
이번 달에 네이버의 도움으로 일본에 쇼케이스를 하러 간다.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박힌 야구 모자를 들고 간다. 야구 선수의 아들이 야구 모자를 만들더니 이제는 아버지가 가지 못했던 그 일본에 간다.
물론 태리타운이 대표선수도 아니고 상징성도 없지만, 이번 일정이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위로가 됐으면 한다. 그리고 이 글로 어머니도 조금 더 편안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