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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웅 May 02. 2019

굳이 골 넣는 센터백이 될 필요는 없다

마케터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분야를 막론하고 업무가 고도화될수록 분업은 필수다. 디렉터는 업무를 세분화하고 그렇게 쪼갠 각 파트에 실무자를 배치해 그들에게 적정한 권한과 책임을 나눠주는 것은 좋은 퍼포먼스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업무에 착수하기 전부터 디렉터와 실무자 간의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 과정에서 ‘적정’에 대한 기준을 찾는 것이 디렉터의 역량인데, 이는 결코 쉽지 않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조직은 점점 산으로 가게 된다. 게다가 이는 당장은 티가 나지 않아서 더 유의해야 한다. 대개 나중에 일이 터지고서야 알게 되니까. 



당신의 포지션은 어디인가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협력하는 부서 또는 부서 내 R&R(role & responsibility)을 디테일하고 명확하게 정의 및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하다. 중요하다. 더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R&R에 대한 개념이 낯선 이들은 스포츠에 빗대서 생각해 보면 쉽다. 


예를 들어 축구경기를 하는데 흔히 센터백이라 불리는 최종 수비수가 발재간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혼자 드리블해서 최전방까지 올라온다면 팀은 찬스를 얻을 수도 있지만 위기에 빠질 확률이 더 높다. 이는 역습 위기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이 반복될 경우 팀원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번에는 레프트백, 라이트백이라고 불리는 측면 수비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측면 수비수는 이름 그대로 수비수다. 주로 부여된 역할은 상대의 측면 공격을 막는 역할이지만, 최근 축구의 흐름에서는 측면 수비수에게 수비 못지않게 뛰어난 활동량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공격에 기여하기를 원한다. 오버래핑을 통해 공격 루트를 다양화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며 위기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는 동시에 동료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유연한 태도로 긴밀히 움직여야 한다. 이는 회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정리하는 과정에 있어 협력부서와 서로 명확하게 합의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문서화하는 게 좋다(물론 큰 조직은 이게 쉽지 않다. 그렇기에 더더욱 문서화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치사하게 땅따먹기하듯 선 긋고 서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유치한 다툼이 되어선 곤란하다. 그러나 유치하게 다 큰 어른들끼리 싸운다. 전쟁이 따로 없다.



명확한 R&R 설정부터

사실 내 경우에만 해도 R&R과 관련된 경험을 떠올리면 다른 팀과 얼굴 붉힌 기억이 꽤 있다. 부끄럽지만 그때 내 수준이 그 정도였던 것이니 누굴 탓하리. 지금 소개하는 에피소드도 R&R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 중 하나다.


아마 유저데이터 분석회의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유저 유입량과 그들의 구매와 같은 서비스 내 관련된 지표들을 보면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마케팅 활동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파악하자는 의도로 갑자기 열린 회의였다. 정기 회의가 아니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참석했다. 이게 문제였다. 회의는 생각 없이 가는 게 절대 아니다.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퍼널’(funnel)이란 단어가 반고리관을 거쳐 유스타키오관을 때릴 때 순간 얼굴이 붉어지며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무슨 말인지 몰라서였다. 아무리 공부를 했다고 해도 전공 용어를 책이 아닌 실무로 대할 때면 아는 것도 낯설게 느껴지는 법이다. 나만 그래? 게다가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불안감은 더욱 증폭됐다. 노트북에 대놓고 검색을 해 보자니 왠지 옆 사람이 볼 것 같고, 스마트폰을 꺼내자니 왠지 딴짓하는 것 같고… 그러다 회의에 점점 몰입하면서 노드가 끊긴 기억들이 하나씩 짜 맞춰지고 달아올랐던 얼굴은 제 온도를 찾았다. (휴~)


아~ 그 뻐널! 



잠시 마케팅 퍼널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는 주로 잠재적 고객을 내 브랜드의 고객으로 끌어들이고 이들에게 충성도를 갖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이야기할 때 주로 쓰이는 용어로, 고객의 행동을 기업의 관점에서 정리한 고객 분석 방법론이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마케팅 활동을 통해 유입된 고객이 내 브랜드를 인지한 뒤 친숙해지고, 구매를 넘어 충성도를 갖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수치로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어렵겠지만 다 와간다. 조금만…) 그리고 이 과정들 속에서 단계별로 데이터(고객의 행동)를 살펴보면서 기업의 활동 중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쉽게 이야기하면 고객과 내(브랜드)가 만나게 된 순간부터 그들이 나(브랜드)를 떠나는 과정 동안의 이야기를 나(브랜드)의 관점에서 숫자로 정리한 관찰일지 같은 것이다. 이때 만남(유입)부터 이별(이탈)까지의 과정 동안 각 단계를 거치면서 고객의 수는 점차 줄어들기 때문에 마치 이 형태가 깔때기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퍼널 덕분에 외출했던 멘탈이 제자리를 찾는가 싶었는데 이내 다시 얼굴은 달아올랐다. 프로덕트팀에서 우리 마케팅팀에 의견을 가장한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팀에서 새로운 광고를 런칭했는데 반응이 좋다 보니 신규 고객이 증가했다. 그런데 문제는 퍼널을 살펴보니 신규 유저 가입은 증가했지만 그 유저들이 구매로 이어지는 비율은 이전보다 못하단 의견이었다. 이전보다 고객의 이탈 비율이 높아졌다는 데이터와 함께 이번 캠페인을 지속할지 논의해 보자고 했다. 고객의 이탈이 우리 팀의 탓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가 아니라 그런 의도였을 것이다. 그 당시는 준비 없이 한 방 맞은 것도 있지만, 솔직히 경험과 실력이 부족했기에 나는 그저 어버버거리다가 다른 캠페인을 기획해 보겠다는 이야기만 하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여전히 부끄러운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막상 회원가입해서 들어왔는데 살 게 없어서 나가는 경우는 아닌지 체크해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한마디 붙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이불킥을 날리기도 했다. 커머스의 경우에는 고객의 유입과 이탈 과정에는 마케팅팀만 관여하는 게 아니다. 서비스 안에서 고객이 사고 싶은 물건을 충분하게 유지하는 일, 계속 들어오고 싶게 만드는 일, 제품의 정보를 꼼꼼히 보고 구매하는 일련의 경험을 쉽고 편하게 서비스를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일 등 개발팀과 프로덕트팀 모두가 관여해야 하는 일이다. 억울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이는 어디까지나 명확하지 않은 R&R로 인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애먼 광고 예산만 조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 치졸해 보이지만. 뒤끝작렬!


그럼 마케터는 뭘 해야 하나?


위 그림과 같이 퍼널 단계를 봤을 때 마케팅팀은 고객을 유입시키는 역할이 가장 주가 된다. 일단 사람들에게 브랜드나 서비스를 많이 알릴 수 있도록 그들과 만나는 접점을 최대한 확보해, 이를 반복 노출시켜 고객이 될 수 있도록 환기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인식(awareness)과 획득(acquisition), 다른 말로 그들의 눈앞에 알짱거리면서 궁금하게 만들고 결국 와보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마케터가 우선 집중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에 반해 이렇게 유입된 고객들을 유지(retention), 다른 말로 고객을 오고 또 오고, 계속 오게 하는 일을 독려하고 활성화하는 것은 마케팅팀보다는 프로덕트팀에서 그 고민을 시작해서 타부서와 협업을 해 나가는 게 더 효율적이다. 마케팅팀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선순위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우리 서비스를 경험한 고객에게 재구매를 유도하거나, 꾸준히 재방문하게 만드는 일에 대한 기획은 프로덕트팀에서 출발을 해야 한다. 마케터는 수비수면서 드리블로 최전방까지 올라가는 아슬아슬한 선수가 되기보다는 상대방 공격수가 슛을 하지 못하게 그의 움직임을 꽁꽁 묶는 역할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 코너킥 같은 세트피스 상황에 수비수들이 함께 올라가는 것은 예외겠지만.


이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조심스러운 게 바로 사일로 이펙트(silos effect, 부서간 이기주의)와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사일로 이펙트는 다른 부서와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상으로 굴뚝 모양 창고인 사일로에 빗대어 조직 장벽, 부서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물론 마케팅팀에서 어떤 고객을 유치하느냐에 따라 고객 유지는 달라지기 때문에, 마케팅팀이 퍼널 마지막 단계까지 책임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커머스의 마케터라면 고객생애가치(life time value)를 따져서 양질의 고객을 유입시켜야 하고 체리피커(cherry picker, 상품이나 서비스 이용은 하지 않으면서 혜택만 챙기는 고객)의 유입을 최소화화는 데 집중해야 한다. 만약 마케팅팀이 근시안적인 자신들의 성과를 위해 체리피커만 잔뜩 유입을 시켰다면 이는 앞서 말한 오너십(ownership)이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계속 강조하지만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처음부터 자신들의 역할을 합의하에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애초에 명확한 R&R 설정이 있었다면 서로 책임을 떠미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일한다"
: 내 취향(taste)을 통해 스스로를 브랜딩한다.


1. 먼저 좋아하는 컬러를 선택한다. 딱 하나만 꼽기 어렵다면 우선순위를 매겨도 된다.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은 가질 필요 없다. 그냥 지금 기분대로.


2. 이제 음악, 음식, 축구팀, 자동차, 정치인 등 무엇이 됐든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브랜드 별로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고른다. 굳이 아빠엄마는 고르지 말자.


3. 선택의 이유를 (꼭) 구체적인 언어로 정리해본다. 그게 말이든 글이든 상관없지만 머릿속에서 막연한 생각으로만 가둬놓지 않으려 한다. 선택의 이유를 언어를 통해 스스로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4. 다양한 선택의 이유들을 모아본다.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키워드를 뽑아본다. 나의 경우에는 주로 ‘디자인’, ‘예뻐서’, ‘숨기는 게 없을 것 같아서’, ‘장인정신’, ‘군더더기가 없어서’와 같은 키워드들이 내가 브랜드를 택하는 이유로 자주 반복되더라. 


5. 시간이 지나서 이 과정을 반복해본다. 여기서 발견되고 변화하는 키워드는 곧 나 자신의 욕망이자 정체성을 의미하며 나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되어 준다. 이를 바탕으로 나만의 브랜드를 오늘도 확립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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