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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웅 May 30. 2019

살면서 가장 잘 쓴 광고글

결국, 이렇게 됐네요

마케터는 다양한 업무를 하게 되지만 본질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세부적인 역할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개 직접 고객과 만나는 글뿐만 아니라 그 고객을 만나는 준비와 관련된 다양한 글들을 쓰게 된다. 마케터는 자신이 작성한 글을 통해 결국 사람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내야 하는 업이기에 글쓰기 능력은 업계를 막론하고 마케터의 필수 스킬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10년 가까이 글잔재주로 밥벌이를 해왔다. 학술저널부터 보도자료, 기획서와 보고서, 때로는 광고 카피를 쓰면서 업을 이어 왔다. 이러한 글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알리거나 특정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광고글’들이었다. 여기에는 성공한 프로젝트도 있고 아쉬운 프로젝트가 더 많다도 있다. 그중에서 특별히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마케팅 효율(?)이 좋았던 광고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가장 성과가 좋았던 광고문의 정체는 바로 우리 부부의 결혼식에 하객들을 초대하기 위해 썼던 청첩문이다. (따지고보면 결혼식에 초대하는 것만큼 상대방의 시간과 돈을 쓰게 하는 것도 없다.) 지인들의 금쪽같은 주말 저녁 시간을, 그것도 4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뺏어야 하는데 어설픈 초대글로는 그들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꽤 공들여 썼다. 무엇보다 기성복 같은 청첩장을 탈피하고 싶었다. 우리 같은 업을 하는 사람들의 지랄병 같은 것일 테다.

그중에서 가장 고심을 많이 했고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손님들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가족과 가까운 분들만 모셔서 그냥 이야기 나누고 즐기는 결혼식이 평소 소원이었던 터라 미드를 너무 많이 봤다… 수용인원이 적은 예식장을 예약했더니 초대하는 게 더욱 애매해졌다. 그래서 예식장 매니저에게 어느 정도 예상하고 부르면 되냐고 물으니 청첩장을 보통 2.5-3배수 정도 돌리면 된다고 하더라. 최대 600명 정도 초대하면 200-250명이 정도가 참석하니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경험상 500명 정도 초대하면 적당할 것이라는 의견을 줬다. 우리 부부는 하객이 많아져서 정신없는 것보다는 적은 분들이라도 즐겁게 즐기다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기에 300명 미만으로 초대를 하자고 합의를 봤다. 후우… 결혼식 준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합의의 연속이다. 결혼을 앞두신 분들은 명심하길…


그런데 만약 예식장 매니저의 말대로 초대 인원의 1/2만 온다면? 그간 나의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1/3이 되어도 이상하진 않다. 그러자 아내가 대뜸 “그럼 일일이 다 인사도 드리고 자기 원하는 대로 같이 떠들고 놀 수 있으니 더 좋을 거야”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초대장을 한 땀 한 땀 열심히 썼다. 그 글이 바로 아래에 있는 살면서 가장 잘 쓴 광고글이다.



"결국, 이렇게 됐네요"

일시: 2018년 6월 23일 (토) 저녁 6시반
장소: 더 클래스 청담 (청담동 82-4번지)
주차: 한남주차장 주차 후 셔틀차량 탑승
문의: 02)516-3636

장소를 클릭하시면 지도를 보실 수 있어요. 아! 우선 저희는 실물 청첩장이 따로 없습니다. 청첩장에는 꽤 두꺼운 고급종이들이 쓰이는데 저희도 많이 받아봤지만 매번 처리가 곤란하더라고요. 모으기에는 짐스럽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누군가에게 중요한 이벤트인데… 버릴 때는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만나는 분들께 조심스레 도장(?)을 찍어드리고 있으니 수첩을 가지고 오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손등에라도 찍어 드릴게요.

여기에도 하이파이브가!


평생 혼자 살 것만 같았던 저희가 결국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만났다 헤어졌다 일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치열한(?) 시간이었죠. 그래도 결국, 이렇게 됐네요. 치열했던 시간만큼 앞으로는 행복하게, 그리고 저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갈 테니 직접 오셔서 저희의 다짐에 힘을 보태주세요.


아래는 저희의 웨딩사진입니다. 따로 스튜디오 촬영을 하지 않았어요.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가 즉흥적으로 찍은 사진이 우리의 지난 몇 년을 요약한 것 같아 그냥 서로 딱 이거다 싶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웨딩 사진에 필수로 등장하는 것이 없네요?!

아이폰으로 찍은 연속 사진


그렇습니다. 저희의 웨딩사진에는 그 흔한 웨딩드레스가 등장하지 않아요. 그럼 예식 당일에 볼 수 있는가? 결혼식장에서 신부의 드레스 입은 모습을 기대하신 분들께도 미리 사죄의 말씀을 드려요. 사실 저도 신부의 드레스 입은 모습이 너무 기대가 됐지만 본인이 평소에 입는 옷으로 하고 싶다고 해서 드레스가 없는 결혼식이 될 것 같아요. 저 역시도 따로 예복을 하지 않고, 평소에 제가 입는 옷 중에 가장 깨끗한비싼 옷으로 대신합니다. 그럼 대체 신부가 어떻게 입고 나오냐고요? 궁금하신 분들은 당일 식장에서 직접 확인을 하시면 될 거예요! 이래도 되나 싶으실 정도일 거예요.


이렇게 초대장을 직접 쓰면서 둘이 함께 했던 사진들을 오랜만에 찾아봤습니다. 죄다 셀피더라고요. 신부는 잘 나온 사진만 올리라고 하는데 그냥 제가 좋아하는 신부의 모습 위주로 올립니다.

저는 이렇게 화장하지 않고 그냥 여행 다닐 때가 가장 예뻐 보이더라고요.


저희는 카페에서 이러고 노는 걸 좋아해요.


만날 제 얼굴만 크게 나온 것 같아 앞으로 밀어봤는데, 그래도 결국 저만 오징어가 되더군요...


이렇게 오징어가 될 바에 그냥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후우...


저는 신부가 이렇게 웃을 때 행복해집니다. 이 날도 저희가 싸우지 않고 가장 길게 하루를 보낸 날로 기억해요. 제가 신부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이렇게 제 앞에서 웃으면 저는 무장해제가 되는데, 이걸 알면서도 이용하지 않는 대쪽 같은 신부입니다. 그래서 저 웃음을 저도 그렇게 자주 보진 못해요, 아쉽게도.


예쁘죠? 이런 모습은 저도 '사진'으로만 봅니다.


저희는 진짜 많이 싸우지만, 놀 때는 진짜 잘 놀죠. 제 감정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매번 갱신하는 그런 대단한 분입니다. 캡사이신 같은 매력이 있죠.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 잘 알기에 큰 기대를 품는 대신 서로 봐주며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살아보는 거죠 뭐. 인생 별 것 있을까요?


지난 몇 달 동안 즐겁고 의미 있는 결혼식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했어요. 플래너 없이 직접 하느라, 게다가 선거까지 앞두고 있어서 정신없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즐기기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식’이라기보다는 ‘잔치’로 생각하고 준비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토요일 저녁에 봬요.


사실 이 초대장을 보내면서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저희가 워낙에 작은 규모의 결혼식을 준비하다 보니 어떤 분들에게 이 초대장을 드려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게다가 요즘 워낙에 일하느라 소원해진 분들도 있는데 그분들께는 한동안 연락도 없었는데 보내야 하나, 그래도 괜히 모르고 넘어가시면 섭섭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많이 망설여졌습니다.


그래도 저희가 이렇게 당신께 초대장을 보냈다는 것은-

 

우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자주 보는 사이거나, 한때 함께 학교나 직장을 다녔거나, 같이 술을 엄청 퍼마셨거나, 일하면서 쌓은 ‘사회적 우정’이거나… 어떻게든 한때 우리는 잠깐이라도 각자에게 의미가 있었던 사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간도 황금 같은 토요일 저녁, 프라임 타임이잖아요. 저희도 워낙에 결혼식에 많이 다니다 보니 곤란하고 불편할 때가 많더라고요. 가긴 가야 하는데 일정이 바쁠 수도 있고 막상 가기엔 조금 상황적으로 불편할 수도 있죠. 저희도 그 마음 다 알기에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초대장을 보내니 꼭 당일에 오시지 않으셔도, 그냥 축하의 마음만 담아 연락 한 통만 주셔도 감사할 것 같아요.


한 때 우리는 잠깐이라도
각자에게 의미가 있었던 사이


6월 23일 토요일 늦은 6시 30분, 앞으로 저희 앞에 벌어질 쉽지 않은 여정에 작은 가르침과 덕담을 해 주셔도 되고 박수로 축복을 빌어주셔도 좋습니다.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봬요. 저희가 함께 문 앞에서 맞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희도 그런 적이 많았는데… mutual friend가 없어서 축의금 때문에 당황하거나, 친구들한테 토스하느라 정신없었던 경험 다들 있으시죠? 그래서 더 이상 친구들에게 토스하지 마시고 ‘토스’하세요. 토스 PPL 아님 네이버페이, 카카오뱅크도 모두 열려 있습니다.


신부 최가희, 신랑 신영웅 드림

결혼 못할 것 같은 아내가 결혼 발표를 했더니 이렇게 회식 자리에서 공연이 성사될 정도로 저는 큰 일(?)을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겁니다...


하객은 몇 명이나 왔을까? 너무나 감사하게도 우리 부부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237명이 참석을 했다. 285명 중 237명 참석, 꽤 높은 호응이었다. 사전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미리 연락준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와준 셈이었다.


신랑 신영웅에게도 너무 행복한 일이고 평생 두고두고 갚아야 할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마케터 신영웅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내나 나나 살아온 인생이 주위 사람을 잘 챙기고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줄 만큼 그렇게 호인(好人) 스타일은 아니기에 자기야 미안 이렇게 높은 참석률은 어디까지나 '잘 쓴 광고글' 덕분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무엇보다 그만큼 꾸미지 않고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썼기 때문에 감히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한다.




지난 12주간의 연재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책에 담긴 에피소드 중에서 일부만 가져오느라 이야기 전개가 매끄럽지 못한 적도 있지만 3개월동안 꾸준히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그놈의 마케팅>이 마케터로서의 지난 저의 10년을 이야기했다면, 앞으로는 매거진 <얼리어답터>​의 편집장으로서 더 유쾌하고 '쓸모' 있는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드립니다. I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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