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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웅 Jun 11. 2019

탁구대에서 일하면 잘 될 것 같은데

Homo consumus의 욕망 #1

비싼 탁구대가 사고 싶어

Homo consumus

You are what you buy. 말 그대로 소비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욕망이나 생활양식, 심지어 권력관계까지 나타내는 지표로 활용된다. 단적인 예로 마이바흐(Maybach)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그 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유추하기보다는 대표나 임원을 연상하게 된다. 그 마이바흐 오너의 소비를 통해 그의 권력과 지위을 자연스럽게 가늠하게 된다.


이러한 소비와 자아를 일치시키는 것은 20세기 들어와 가속화됐다. Homo consumus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대인은 '소비하는 인간'으로 정의되고 있다. 우리는 늘 뭔가를 소비하면서 스스로를 표현하기도 하고 타인과 구분 짓기도 한다.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진행된 소비가 다시 욕망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무제, 1987)이다. 처음 봤을 땐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왜냐고? 보면 안다. 일단 그의 작품을 보라.



I shop therefore I am.


이 짧지만 강력한 문장이 당신의 후두부를 톡 건드리지 않던가? 혹시 쇼핑이라는 키워드로, 바바라 크루거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의 메시지를 단순히 여성에 국한시키는 시대착오적 졸렬함은 부리지 말자. 대신 자신의 카드내역서나 통장 잔고를 살펴 보자. 마냥 피식 웃어넘기기엔 뒷맛이 씁쓸한 작품이지 않나?


그렇다, 나 역시도 뭔갈 사지 않고선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극히 세속적이며 소비지향적 존재이다. 자동차나 랩탑 같은 고관여 제품뿐만 아니라 치약이나 비누 같은 생활용품을 고를 때도 철저하게 취향을 듬뿍 담아 골라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렇다 보니 카드값이 나오는 날은 으레 아내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으며 살아간다. 이미 '유부남씬'에선 신탁이나 다름없는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라는 말처럼 그렇게 매일 용서를 구하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잔잔한 소비 일상 중 폭풍 같은 녀석을 만났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비싼 탁구대 You & Me Standard 핑퐁 테이블이 그 주인공이다.



이 테이블은 가구와 하우징 제품을 전문으로 만드는 스페인 업체의 작품이다. 제품인 동시에 작품이다. 이 회사의 창업주인 라파엘 로드리게스(Rafael Rodriguez, 하파엘이라고 불러야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은 단순히 가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만드는 동시에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제품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 잠시 탁구를 쳤었었었다. 선수반이라고 하는 그곳에서 매일 거울을 보며 훈련 시작 전에 3,000번 스윙, 훈련 중에 실수하면 구석에 가서 100번 스윙을 하고 돌아와야 했다. 훈련을 마치고 정리하면서 또 3,000번 스윙... 결국 도망쳤다. 그래서 탁구는 쳐다보기도 싫은 운동이다. 그런 내가 탁구대를 사고 싶다니,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3,360유로, 한화로는 400만원이 훌쩍 넘는 금액의 탁구대라니.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탁구를 치겠다는 건 아니다. 얘는 분명 정식 규격 사이즈의 탁구대로 플레이를 즐길 수도 있지만 사실 다이닝 테이블이나 오피스 테이블로 활용할 때 더 그 가치가 높아진다고 생각최면 한다. 그냥 네트를 걷어내기만 하면 바로 테이블로 변형이 된다. 게다가 상판은 실제 탁구를 칠 수 있을 만큼 고압축 라미네이트 소재로 되어 있어 생활 흠집에도 강하다. 다리 부분은 수분에 강한 이로코 목재로 제작되어 있으며 나머지 철제 부분에는 전부 방수 코팅이 되어 있어서 주방이나 서재에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 한다).


그렇지 않은가? 오피스에 하나만 놓으면 팀 전체가 사용할 수 있는 사이즈다. 파티션 없다고 징징거리겠지...



몇 개월 전에 서재를 꾸민다며 '예산 집행'을 했었다. 그러나 모든 사업이 그렇듯 예산이 넉넉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이케아에서 대부분을 해결했다. 물론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바로 테이블이었다. 서재에서 화룡점정과도 같은 것이 바로 테이블일 텐데 그곳에는 나를 만족시켜줄 테이블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했지만 못내 아쉬웠다. 무엇보다 사이즈가 아쉬웠다. 그런데 이 핑퐁 테이블은 그냥 딱이었다. 자료 널부러놓고 작업하기 좋아하는 나에게 이 아이는 완벽 그 자체였다.



사실 나는 이미 나를 충분히 설득했다.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 더 많은 자료를 검색할 필요도, 사야 할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는 '결제'를 하지 못한다. 이제는 '결재라인'이 변경됐기 때문이다. 사장, 회장보다 위에 있다는 '아내'의 결재란은 쉽게 사인이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전결'로 행해지던 모든 소비들은 결혼 후 계속 보류 상태로 쌓여만 가고 있다. 그 와중에 다시 테이블을 산다고, 그게 탁구대라고, 그게 400만원이 넘는다고 하면...... 등짝 스매싱만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허락보다 용서가 어려울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든다.



용기를 내서 아내에게 핑퐁 테이블을 보여줬다. 무심한 척 어떠냐고 물었지만 속으로는 대학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그때처럼 숨죽이며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이리저리 쓱쓱 보더니 아내가 입을 열었다.


"탁구 치러 갈래?"

"......"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는 순간 경기는 끝난다. 언젠가 이 아이가 우리 집 서재에 들어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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