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1997년 새해가 되었다. 올해는 내 인생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한 해가 되리라. 졸업도 해야 하고 취업도 해야 한다. 대학 입학 후 많은 시간을 영어에 투자했다. 당시 영어 실력이 취업의 가장 큰 척도가 되던 터라 많은 대학생들이 전공보다 영어공부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 스터디 서클 활동도 하였고, 한 단계 높은 영어 실력을 갖추기 위해 뉴질랜드 유학도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 초 토익 시험을 보았다. 결과는 860점. 그 당시 860점은 상위 3% 안에 드는 점수였기에 나름 만족하였고, 더 이상은 토익 시험을 보고 싶지 않았다. 영어공부는 이제 그만! 졸업을 위해 학점 관리도 해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하고, 취업을 위한 원서 지원 등등 할 일이 태산이다.
4학년으로 복학을 하였고 1학기 교양과목 중 하나로 일본어를 택했다. 지난 12월, 뉴질랜드는 떠날 때 마사히로에게 약속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재회를 위해 일본에 꼭 가겠노라고. 영어를 잘하는 학생은 너무 많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영어 하나로는 왠지 취업 시 경쟁력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왕 마사히로를 만나러 일본에 가는데 관광뿐만 아닌 학습도 병행하면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일본 유학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았다. 여름방학 단기코스가 눈에 띄었는데, 비행기 왕복과 2개월간의 수업료 및 기숙사 비용을 모두 합쳐 150만 원. 구미가 당겼다. 6월까지 열심히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 그 돈은 모을 수 있다. '추진'하면 '나',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과외수업을 2개 진행하고, 교양과목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사설학원에도 다녔다. 내 책상 주변 여기저기에는 일본어 단어가 적힌 포스트잇이 가득해졌다. 영어라는 외국어를 공부해본 경험이 있기에 어떤 식으로 학습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나름 방법이 있었다.
7월이 되었다. 마사히로는 지난 4월에 일본에 돌아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어 학습에 대해서는 시간적으로 짧았기에 기초에 대해서만 파악을 하였고, 두 달간의 어학연수 과정에서 많이 배워오리라 결심하며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질랜드 이후로 두 번째 방문 국가 일본. 많은 것이 궁금했다. 나리타 공항에 내리니 학교 관계자가 기다리고 있었고, 나 외에도 여러 명의 학생이 같은 버스에 올랐다. 한참을 달려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기숙사에 도착했다. 외관상으로는 좀 낡은 아파트였지만 내부는 괜찮겠지라는 희망을 가지고 배정된 숙소의 현관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랐다. 10평이나 될까 한 아주 좁은 공간에 이층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즉, 4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숙소라는 것이다. 침실 공간 외에는 아주 작은 화장실과 싱크대가 있었다. 정말 심했다. 햇빛도 잘 안 들어와서 어두웠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퀴벌레도 꽤 많다. 이건 무슨 수용소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데를 기숙사라고 하는지 한숨밖에 안 나왔다. 뭐 어쩌겠는가. 돌아갈 수도 없고. 일단 짐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걸어서 30분 거리의 학교로 갔다. 많은 학생들이 모였는데 반 배정을 위해서 레벨 테스트를 한단다. 상중하 3단계로 반을 나누어 레벨별 수업을 한다는 건데 나의 레벨이 어느 정도로 나오는지 살짝 떨렸다. 테스트 결과 레벨 1, 상급반이다. 의외였다. 종이로 테스트를 하는 게 아닌 일본인 선생님과 간단한 인터뷰를 하는 게 전부인데, 한국에서 그동안 원어민과 회화 공부를 열심히 해서인지 기초적인 듣기와 말하기는 가능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상급반? 기분이 좋기보다는 뭔가 이상했다. 첫 수업이 시작되어 선생님이 들어오시는데, 아니 웬 할아버지가 돋보기안경을 쓰시고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수업 교제도 학교나 학원에서 배우던 회화 위주의 재미있는 교제가 아닌 무슨 논어 맹자 같이 한문이 잔뜩 있는 한자 수업 책과 유사했다. 이런 게 상급반 클래스인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선생님 같은 교제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교제에 쓰인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건 둘째 치고, 할아버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너무 낮고 작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아 재미없다. 반을 바꿔달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며칠의 수업을 진행한 후 어느 주말, 드디어 마사히로가 왔다. 마사히로가 사는 곳은 '치가사키'라는 도시인데, 도쿄에서 기차로 약 1시간 10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간다. 반년만의 만남이었지만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둘은 너무 반가워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날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기숙사에서 함께 잤다. 다행히 침대가 하나 비어서 다른 룸메이트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다들 일본인이 기숙사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고 크게 환영을 해주었다. 그런데 숙소 환경에 마사히로가 꽤나 놀랐나 보다. 며칠 후 연락이 왔는데, 치가사키 본인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나 또한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학교 수업도 영 재미가 없던 터라 실례를 무릅쓰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본인은 본인 집에 손님을 거의 초대 안 한다. 친인척이나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집안 내부를 보여주기를 꺼린다. 마사히로는 물론이고, 처음 보는 외국인인 나를 마사히로의 친한 친구라는 거 하나만으로 초대해준 것에 대해 그 집 식구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어차피 치가사키로 내려갈 것인데, 굳이 반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2주간의 수업을 대충대충 마치고, 마사히로 집을 향해 출발했다. 기차를 타고 치가사키 역에 도착하니 마사히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거기서 다시 전철을 타고 두 정거장을 가니 '가가와'역이 나왔다. 가가와 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들어가니 드디어 마사히로 집이 나타났다. 전형적인 일본 목조주택이었다. 마사히로의 부모님께서 크게 환영을 해주셨다. 아버지는 '기꼬만'이라는 큰 간장 제조회사에서 해외사업을 담당하고 계셔서 영어가 아주 유창하시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가정주부로써 앞치마를 두르시고 밝은 얼굴로 외국인인 나를 맞이해주셨다. 식탁에 스시가 차려져 있었고, 마사히로와 나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4명이 저녁 식사를 했다. 일본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스시 전문점에 주문을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가 아직은 일본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영어로만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 배운 일본어 단어나 기본적인 문장을 이야기할 때면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무척 반가워하셨다. 첫날 실수한 문장은 '어디 사느냐?'라는 질문에 '한국 대전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すんでいます'가 아닌 'しんでいます' 즉, 우리말로 하면 '죽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니 모두가 크게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분위기 좋게 저녁을 먹고 있는데, 마사히로 누나가 퇴근을 하여 집에 왔다. 말로만 들었던 누나가 드디어 온 것이다. 밝은 얼굴과 높은 목소리 톤으로 환영 인사를 해주셨다. 역시 영어로는 대화가 잘 안 되었지만 내 일본어를 이해하려고 꽤나 귀 기울여 주시니 너무 고마웠다. 몇 시간 저녁을 먹으며 마사히로 누나와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첫인상은 한마디로 아주 밝았다. 얼굴로 밝고 분위기도 밝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었다. 마사히로는 나보다 세 살이 어리다. 마사히로의 누나는 마시히로 보다 네 살이 많다. 고로 나와는 한 살 차이다. 지금의 와이프와 운명적인 만남인지 그때는 몰랐다.
치가사키로 내려온 지 1주일이 지났다. 내 방을 마련해주셔서 편안하게 잠도 자고 식사도 마사히로와 똑같이 제공을 해주셨다. 벌써 1주일씩이나 뻔뻔하게 무전취식을 하고 있다. 그래도 부모님들은 처음과 똑같이 밝은 얼굴로 대해주신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마사히로와 오사카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 함께 어울렸던 일본 친구들이 대부분 오사카나 교토에 살고 있다. 당연히 오케이. 예전 친구도 만나고 남서부 여행도 하고 일석이조다. 자금이 넉넉지 않은 관계로 갈 때는 신간센을, 올 때는 일반 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오사카역에 도착하니 낯익은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쇼상, 그 외 여자 친구 마사에상, 함께 낚시를 다녔던 기무라상, 그리고 차 사고 당시 뒤에 앉았던 아사키상, 그 외에 몇 번 얼굴만 봤던 여러 명이 함께 였다. 뉴질랜드에서는 영어로만 대화하던 사이였는데, 그나마 조금 배운 일본어로 인사도 하고 간단한 대화도 하니, 친구들이 놀란다. 그날 오사카성을 비롯하여 여러 군데 관광을 하였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다. 이제 잠잘 곳이 필요한데.. 딱히 정해놓은 곳이 없다고 하니, 아사키상이 본인 집으로 가자고 흔쾌히 제안을 했다. 아사키상 집에 도착을 하니 다다미가 있는 거실로 안내가 되었고, 어머니와 할머니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날 밤,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으며 예전 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취기가 올라온 마사히로는 춤까지 추었다. 큰 환대를 받은 다음날, 일본의 옛 수도 교토로 갔다. 한국의 경주와 같이 절과 고풍스러운 유적지가 많았다. 여러 명이 우르르 함께 다니니 재미가 배가 되었고 젊음이 좋은지 뭘 해도 즐거웠다. 그날도 날이 저물었고 역시 머물 곳이 필요했다. 그때 선뜻 기무라상이 본인 집에 전화를 건다. 어렵사리 허락을 받은 얼굴로 우리를 집으로 안내했다. 어제의 아사키상 집과는 또 다른, 뭐랄까 약간 딱딱한 분위기 속에 조용히 2층으로 안내되어 올라갔다. 순간 놀랐다. 2층이 하나의 통으로 된 큰 방인데, 5명의 이불이 가지런하게 펼쳐져 있었고, 머리맡에는 칫솔과 치약이 개별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무라상의 부모님은 고민 끝에 초대를 했지만,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준비를 잘해두신 것이다. 다들 너무 고마우신 분들이다. 다음날, 아침까지 잘 대접받고 길을 나섰다. 이제는 다시 마사히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역으로 향했고, 올 때는 2시간 남짓의 신간센을 이용했지만 돌아갈 때는 16시간이나 걸리는 일반 열차에 올랐다.
또다시 마사히로 집의 내 방에서 무전취식이 이어졌다. 부모님들도 처음에는 머리 모양이나 외모에 신경을 쓰셨지만 하도 오래 머무니 이젠 식구로 생각하셔서인지 편안해진 모습이 되셨다. 가끔은 슈퍼에 가서 장을 봐와 한국 음식을 요리해 드렸다. 하루는 비빔밥을 하기로 했는데, 콩나물을 삶았는지 생으로 먹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야채도 생으로 비비는데 콩나물도 그렇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대접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다고 다들 말려서 삶아서 먹은 적이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삶는 게 맞다. 마사히로의 누나인 아야상과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다. 나의 어렸을 때 이야기, 대학 이야기, 군대 이야기, 친구 이야기 등등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했다. 이걸 다 일본어로 한다. 당연히 단어량이 딸린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 아야상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눈치를 채고 해당하는 단어를 알려준다. 정확한 문장도 알려준다. 못 알아들으면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이야기해준다. 학원에서 할아버지 선생님한테 논어 맹자 책으로 일본어 공부하는 것보다 열 배 백배 효과가 있다. 군대 이야기를 할 때는 상황이 슬퍼서인지 눈물까지 보였다. 마음도 매우 여리고 너무 착했다. 이렇게 밝고 착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을 내 주위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끌렸다. 하지만 친구의 누나이니 존중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데이트가 우연히 성사되었다. 원래는 마사히로와 불꽃놀이 구경을 가기로 했는데, 마사히로가 며칠 전부터 심한 감기가 걸려서 끙끙 앓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었는지 아야상이 대신해서 불꽃놀이에 함께 가기로 했다. 집 밖에서 갖는 둘만의 시간은 처음이다. 내심 기쁜 마음에 마사히로가 아픈 게 눈에 안 들어왔다. 전철을 타고 몇 정류장을 가니 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큰 강가의 강둑에 많은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더 잘 보기 위해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자리 차지에 질 내가 아니었다.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재빨리 돌아다녔고, 꽤 괜찮은 곳을 발견하여 아야상에게 여기 잠시 있으라고 한 후, 깔고 앉을 만한 박스 종이를 구해와서 자리를 잡았다. 나중에 와이프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이런 내 모습이 든든했다고 한다. 'Oh Thank God.' 그날 밤늦게까지 화려한 '하나비' 구경을 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흘러 벌써 마사히로 집에 머문 지가 한 달이 넘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뻔뻔하다. 정식으로 돈을 내가 하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마사히로의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달 넘게 무전취식을 하다니.. 너무 뻔뻔하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늘 한결같은 마사히로 가족이었기에 실례 무릅쓰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2주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간이 얼마 없다. 아야상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일부러 아야상이 퇴근하고 역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기다리다 함께 오곤 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밤, 공원의 벤치에서 고백을 했다. 사귀고 싶다고. 그리고 아야상의 대답이 이어졌다. 'わたしも.' 아야상과 사귀기로 했다는 사실은 아직 부모님은 모르신다. 물론 마사히로는 알고 있으며 서포트를 해주기로 했다. 누나까지 맡길 만큼 나와의 우정이 정말 깊었다는 데에 너무 감사함을 느낀다.
출국 1주일 전, 학원이 있는 도쿄로 올라왔다. 처음 일본에 와서 2주일간 학원에 다니고, 5주일간 결석을 한 후, 마지막 1주일을 남겨놓고 나타난 것이다. 학원에서는 처음 2주일간 열심히 했다고 수료증은 준다고 한다.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준다니 고맙게 받아야지. 마지막 수업 며칠간, 크게 향상된 내 일본어 실력에 같은 반 학생들이 놀란다. 새우가 일본어로 뭔지 모른다고 다들 비웃던 그때와는 완전 달라진 모습이다. 아마 재미없는 이 교실에서 8주간 책으로만 공부를 했다 한들 원어민들과 실생활에서 필요에 의해 배운 일본어에는 감히 비교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나에게는 이제 여자 친구가 된 개인교사가 있지 않았는가! 마지막 날, 학원으로부터 수료증을 받고, 마사히로 집에 전화를 하여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아야상에게도 각별히 인사를 한 후 김포행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8주간의 일본 어학연수. 친구도 만나고 일본어를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도전이었고, 결과적으로 일본어 실력뿐만 아니라 나의 평생 배필을 만나게 되는 행운의 모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