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기마다 코스를 정할 수 있는데, 이번엔 좀 더 젊은 코스를 공부해 보기로 했다. 영상 관련 학문인데 코스명은 'TV & VIDEO PRODUCTION'. 역시 16명 클래스이며, 예상대로 연령층이 아주 젊었다. 젊고 어린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그리 친절하지 않다. 유일한 비 영어권 학생인 나에게 친절하게 해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뭐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서 큰 기대도 없었다. 다행히 수업은 이전 코스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방송 및 장비와 관련된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여러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휴대폰 카메라 하나로 촬영 및 편집을 하여 유튜브를 통해 방송을 쉽게 할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16mm 비디오테이프를 넣는 큰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촬영을 한 후, 녹화된 테이프를 거대한 편집 장비에 넣고, 두 개의 화면중 하나에 띄우고 또 다른 화면을 보며 편집을 한 후 새 테이프에 저장을 한다. 프레임 컷, 화면 전환 효과, 텍스트 삽입, 음악 삽입 등 기본적인 기능을 제공한다. 전부터 남들 앞에서 공연을 여러 번 해본 나에게는 거부감보다는 뭔가 설렘으로 다가왔다. 코스를 잘 선택한 것이다.
자취 생활을 한지 대략 3개월 정도가 지났다. 다른 건 큰 불편은 없었지만 전편에서 이야기 한대로 주인아주머니와 친구들이 집으로 영업 손님들을 데리고 와 밤늦게까지 적절치 못한 부업을 하는 빈도가 늘어갔다. 시끄러울 때마다 아는 형네 집에서 신세 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뭔가 결정을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요일에 가끔 들리는 성당에서 알게 된 친절한 할머니가 솔깃한 말씀을 해주셨다. 집에 방이 2개나 남아도는데 소개해 줄 사람 없냐고. 내친김에 미사 끝나고 할머니 집에 방문을 했다. 산 중턱에 있는 핑크색 하우스인데 전망이 너무 좋았다. 핑크 하우스에는 할아버지도 함께 사셨는데, 한국전 참전용사다. 그래서 할머니가 한국에 더 애착을 느끼시는 거 같다. 요 몇 달간 급속히 친해진 마사히로가 생각이 났다. 낚시를 좋아하는 그를 따라 여러 번 밤낚시를 갔다. 정말이지 낚싯줄을 넣기만 해도 팔뚝만 한 'Red cod'가 쉽게 잡혔다. 한 번은 낚싯줄을 바다에 던져놓고 잠시 한 눈을 팔았는데 미끼를 문 물고기가 얼마가 힘이 세던지 낚싯대를 순식간에 끌고 들어가 버렸다. 빌려온 낚시 대였는지라 눈물을 머금고 거금을 들여 보상을 해주었다. 바다낚시 외에도 장어 낚시도 자주 다녔다. 장어 낚시는 낚싯줄과 훅만 있으면 된다. 미끼는 냄새가 진한 양고기. 낚싯줄에 훅을 매달고 양고기를 끼워 강가에 던져 넣으면 그 냄새를 맡고 장어가 슬슬 올라오는 게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장어보다 훨씬 크다. 현지 사람들은 장어를 'Monster'라고도 부른다. 1인당 6마리까지만 잡을 수 있었는데 워낙 사이즈가 커서 충분했다. 이렇게 잡은 장어는 힘이 세서 다시 강으로 튀어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훅에 매달린 채로 바위에 몇 번 패대기 질을 해서 기절을 시켜야 한다. 집에 와서는 못을 박은 각목에 목을 꿰고 비닐을 벗기고 내장을 제가 한 후 토막을 내서 오븐 쟁반에 담는다. 와인을 바닥에 깔고 양파를 간장을 함께 넣은 후 45분간 오븐 찜을 하면 정말 맛있는 장어 안주가 탄생한다. 단순히 낚시만 같이 다닌다고 마사히로와 친해진 것은 아니다. 큰 해프닝이 있었다. 어학교에 다니는 A라는 친구가 중고차를 샀다. 한국에서 운전을 여러 번 해본 나는 그 차를 너무 몰아보고 싶었다. 뉴질랜드는 한국과 주행 방향이 반대다. 오토메틱이 아닌 스틱 자동차였는데, 당연히 스틱 조정도 왼손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 낯선 조건에서도 드라이브를 너무 하고 싶어서 그 친구에게 조르고 졸랐다. 운전은 자신 있으니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마침내 허락을 받아냈고, 나와 함께 드라이브하기를 원하는 친구 둘이 있었는데, 마사히로와 아사키상. 아사키상은 나이가 20살밖에 되지 않은 호기심 많은 소녀였다. 아사키상과는 나중에 오사카에서 만나게 되고, 지금도 페이스북을 통해 가끔 연락을 하고 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마사히로와 아사키상을 태우고 계곡 쪽으로 출발했다. 15분 정도 달리니 장어를 잡던 계곡 입구에 들어섰고, 계속해서 위쪽으로 속도를 높여 달렸다. 아침부터 비가 와서 아스팔트 도로가 꽤나 젖어 있었지만 너무나 신이 나서 100km 이상을 밟으며 꼬불 꼬불한 계곡을 오르고 올랐다. 순식간이었다. 커브길을 돌고 있는데 차가 미끄러져 빙글 돌더니 계곡 산비탈로 떨어졌다. 쿵 소리가 나면서 앞 유리창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그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런 일이 나한테도 벌어지는구나.' 옆에 앉은 마사히로를 보았다. 그도 너무 놀라 말을 제대로 못 했고, 뒤에 앉은 아사키상은 머리에서 피가 났다. 차에서 내려 상황을 확인해보니, 천만다행으로 차 옆구리가 큰 나무에 부딪혀 V자로 꺾여 있었다. 그 나무가 없었다면 아래 산비탈로 굴러 떨어져 계곡물에 빠졌을 확률이 높다. 서둘러 마사히로와 아사키상을 차에서 내리게 한 후 근처 골프장에 가서 앰뷸런스를 불렀다. 나와 마사히로는 안전벨트를 맨 덕분에 큰 상처는 없었지만 가슴 통증이 심했다. 아사키상은 병원으로 갔고, 토잉 차가 와서 사고차를 실어갔다. 그날 저녁, 다행히 아사키상은 큰 상처가 아니라서 간단히 치료를 받고 돌아왔고, 나는 그 둘에게 너무 미안해서 피자와 맥주를 제공했다. 마사히로와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하는데, 아직도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다. 또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차주인. '3천 달러'라는 큰돈을 들여 마음에 드는 중고차를 산지 사흘 만에 내가 부셔 먹은 것이다. 차는 폐차를 했고 엔진 값으로 200달러를 받은 게 전부다. 차주인은 우리가 다친 것보다 그 차에 대한 아쉬움이 컸는지 끝내 눈물까지 보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지고 있던 비상금을 탈탈 털어 '3천 달러' 전액 보상을 해주었다. 그날 이후로 눈물의 보릿고개가 시작되었다.
마침 마사히로도 자취방을 옮기려던 차여서 함께 핑크 하우스에 입주하기로 했다. 전망이 탁 트인 산 중턱의 핑크 하우스 앞마당에 마련된 흔들의자에 앉아 산들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또한 친한 친구와 늘 함께 있어 장도 같이 보고 요리도 같이 해 먹다 보니 예전 보다도 훨씬 재미있는 유학 생활을 즐기게 된 것이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눈물의 보릿고개를 넘는 중이라 장을 보더라고 가장 싼 것만 고르게 되었고, 하루는 개나 고양이 사료가 있는 코너에 살코기가 붙어 있는 큰 소 뼈를 단돈 1달러에 사게 되었다. 그걸로 사골 국물을 만들어 밥을 말아먹었는데, 나뿐만 아니라 마사히로도 꽤 맛있다고 좋아했다. 그 소문이 퍼졌는지 한두 달 후 그 소 뼈는 사료가 아닌 사람이 먹는 고기 코너에 진열이 되었고 가격도 3배나 뛰었다. 나도 마사히로도 사교성이 있는 편이라 그동안 친구도 많아져서 집에 찾아오는 친구 손님들도 많았다. 함께 밥도 먹고, 낚시도 하고, 가끔은 계곡 골프장에 가서 골프도 치고, 다운타운에 나가서 Pub에 들려 술도 한잔 하곤 했다. 유학 6개월을 넘어 현재의 나를 보니, 현지인 친구는 착한 마크 하나뿐이고 그 외에는 한국 또는 동양인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애초 생각과 달라진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만큼 유학생활은 외로움이 큰 것이다.
코스 수업은 무난하게 진행이 되었다. 팀 프로젝트가 많다 보니 클래스 메이트들과도 친분이 깊어졌다. 영상 프로젝트다 보니 각자의 프로젝트를 다른 팀원들이 도와주는 것이다. 촬영이나 조명을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배우가 되어 연기도 해야 했다. 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내가 해 주었던 것처럼 다른 팀원들도 성심껏 서포트를 해주었다. 이렇게 프로젝트가 끝나면 영상 편집실에서 편집과 효과를 넣고 완성을 한 후, 교수님을 포함해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시연회를 갖는다. 내가 만든 시나리오와 영상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서 평가를 해주는 것이 왠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 코스만의 장점이었다. 이렇게 팀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영어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고, 내가 만든 시나리오를 토대로 연기를 해줄 팀원들에게 대본의 느낌을 잘 설명을 해주어야 하기에 꽤나 섬세한 단어 선택을 해야 했고, 나중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긴 시간 영어로만 이야기를 하기에 영어회화에 목말라 있는 나에게는 참으로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추석이 되었다. 명절이 되면 해외에 있는 유학생들은 더욱 고국이 그립기 마련이다. Nelson에는 한인 가정이 대략 10집 정도 있었다. 이 도시는 한인이 별로 없기 때문에 슈퍼에 김치나 소주, 라면과 같이 한국인이 애용하는 음식품이 거의 없다. 가장 비슷한 것을 찾아서 그럴듯하게 만들어 먹는 것이 최선이다. 자취를 하는 나에게도 김치는 꽤나 먹고 싶은 음식인데, 한인 가정중 몇 집과 친해져서 무생채를 많이 얻어먹었다. 이번 추석을 맞이하여 한인 10 가정이 공원에 함께 모여 명절을 즐기기로 했다. 물론 한인 유학생들도 초대가 되었다. 그 수가 대략 10명. 다 함께 모이니 30명이 넘는 나름 큰 규모의 행사가 되었다. 인구 1만 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에서의 한인 잔치라서 이 정도 인원이지 Christchurch 또는 북섬의 가장 큰 도시 Auckland 같았으면 모두 모일 수도 없겠지만 그 수는 최소 수 백이 되었을 것이다. 한인 어른들이 명절이 되었다고 유학생을 챙겨주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맙고 정겨운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잔치면 등장하는 여러 맛있는 음식과 소주와 가장 비슷한 러시아 보드카에 오이를 넣은 술을 한잔 기울이며 그렇게 그렇게 즐거운 추석을 보낼 수 있어 참 행복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그중 한 가정에 라면을 두 박스 보냄으로 소소하게 고마움의 인사를 했다.
유학 생활은 참으로 힘들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공부가 힘들어서? 아니다. 외로움이다. 한국에서는 매일 많은 친구들과 만나고, 놀러 다니고, 행사도 많고, 선후배들과 공부도 하고 막걸리도 마시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바쁜 일상을 보내던 내가, 뉴질랜드 외딴섬 작은 도시에 와서 몇 안 되는 지인들과 만나도 크게 할 이야기가 없는 그저 그런 나날을 보낸다는 게 여간 지루한 게 아니었다. 물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도 머릿속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라고 생각이 들 때가 점점 많아졌다. 이제 코스가 2개월도 안 남았는데 공부가 손에 안 잡힌다. 무엇이 문제일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고 지금도 뉴욕에서 살고 있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조심스러운 결론에 이른다. '자극'. 난 한국에서 '자극'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인간관계도 술자리도 유흥도 심지어 공부도 온통 '자극'이다. 마약 중독자가 서서히 마약에 중독되듯이 나 또한 자극 중독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농촌 국가인 뉴질랜드는 오후 6시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24시간 어디서든 술자리를 가질 수 있는 한국과는 완전 딴판이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이렇게 저녁이 되면 가정으로 돌아가 수수하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아침을 맞이한다. 그들은 이게 일상이며 대부분 '자극'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기껏해야 비디어 대여점에서 액션 영화를 빌려 보거나, 일 년에 몇 번 없는 시끄러운 하우스 파티가 전부다. 물론 한국에서도 자극적이지 않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도 그들은 Nelson에서의 자극 없는 생활에 나보다는 더 잘 적응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다. 혹시라도 만날 수 있는 '자극'이 없는 상황에 대비하라고.
이제 코스가 한 달 밖에 안 남았다. 그래서 교수님이 모든 학생들에게 프로젝트를 부여했다. '졸업작품전'. 지금까지 배운 모든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졸업작품을 만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 작품씩 시사회를 한다는 것이다. 흥분이 되었다. 마치 내가 영화감독이 된 것처럼 어떤 시나리오와 어떤 배우 그리고 어떤 효과를 넣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먼저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제목은 'Independence day'. 그 당시 상영했던 영화인데 워낙 세계적으로 흥행했고, 나에게도 큰 인상을 주어서 그런지 그냥 그렇게 일단 제목을 붙이고 싶었다. 출연을 할 배우들을 먼저 섭외해야 했다. 그래야 그들을 바탕으로 스토리 라인을 잡을 수 있다. 내 친구 마크는 단번에 오케이를 했고, 클래스의 다른 친한 친구인 'Matthew'에게 부탁을 했다. 대신 그 친구의 작품에 내가 출연하기로 약속해주는 건 기본. 스토리 라인은 대충 이랬다. 내가 주인공이고, 어느 날 우연히 Matthew를 만나 팔씨름을 했는데 졌다. 몇 번 더 했지만 모두 졌고, 비웃는 그 친구의 얼굴 앞에서 자존심이 너무 상처를 받는다. 그 후 재대결을 위해 록키 배경음악을 바탕으로 열심히 운동을 한다. 계곡도 달리고 나뭇가지 올라타고 계단도 뛰어올랐다. 나름 열심히 운동을 한 후, 다시 Matthew를 만나 재대결을 요청했다. 결과는 참패. 시름시름 앓으며 술병을 들고 벤치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뿅'하고 마크가 나타난다. 그는 일종의 신이다. 나에게 물었다. 왜 그리 낙심해 있냐고. 단 한 번이라도 Matthew를 이기고 싶다 했고, 그 신은 솔깃한 제안을 한다. 만약 Matthew를 이기게 해 주면 너의 목숨을 나에게 줄 수 있냐고. 고민 끝에 답을 했다. DEAL! 그 신은 내 머리를 잡고 신비가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당장 Matthew를 찾아갔다. "야 한판 더 붙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ㅎㅎ 얼마든지.." 자리를 잡고 서로의 손을 움켜잡았다. '시작!' 단숨에 내가 이겼다. Matthew는 놀라서 큰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믿을 수 없다고. 나는 너무도 신이 났다. 계속 웃으며 자주 가던 공원에 도착했는데 그 신이 나타났다. "이겼느냐?" "하하 너무도 통쾌하게 이겼어. 다 네 덕분이야. 하하" "잘 되었군. 그럼 이제 약속을 지켜야지?" "무슨 약속?" "음.. 잊어버렸나? 이기게 해 주면 너의 목숨을 주기로 한 것을?" 순간 웃음이 사라졌다. 너무도 기쁜 마음에 들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 농당이지.. 요? 팔씨름 한번 이기게 해 줬다고 무슨 목숨까지.." 화가 난 신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내 머리를 잡고 목숨을 앗아가는 주문을 외운다. "안돼~ 안돼~" 소리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술병을 들고 벤치에 쓰러져있던 나를 발견한다. 꿈이었던 것이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결심한 듯이 한마디 한다. "그래. 누구에게도 의지 하지 말고 내 힘으로 하는 거야. 오늘이 나의 Independence day야." 뛰어가는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시나리오대로 촬영을 했고, 출연진들도 모두 잘해주었다. 음악 효과 등 편집을 해보니 대략 9분 정도의 필름이 되었다. 주위 친구들에게 먼저 보여주었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시사회 날. 교수님을 포함한 모든 클래스메이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 사람 한 사람 본인의 작품을 선보였다. 때로는 웃음, 때로는 환호성과 박수.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상영을 했고, 다행히 뜨거운 반응으로 축하해 주었고, 몇몇 친구들은 내 작품을 카피해서 가져가도 되냐 물어봤다. 정말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런 작은 졸업작품 시사회에서도 감동을 느끼는데, 큰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감독이나 배우들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어느덧 시간이 흘러 12월이 되었다. 이제 1주일 후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두 개의 코스를 수료하였고, 그 과정을 통해 많은 영어를 배웠으며, 뉴질랜드를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사고방식을 보았고, 한국이 아닌 외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내 인생 최초의 백인 친구 'Mark'.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도 수차례 편지가 오갔다. 떠나기 전, 마크와 저녁을 먹고 난 후, 한국에서 가져온 기념품을 주었다. 기념품이 몇 개 되지 않아서 나중에 출국 전에 고마웠던 몇 명에게만 주려고 보관했던 것인데, 한복을 입은 신랑 신부 인형이다. 또 한 명의 일본인 친구, 마사히로. 끝까지 내 옆에 있어 주었고, 외로울 때면 가장 친한 말벗이 되어 주었다. 둘 다 술을 좋아해서 술 한잔 마시며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출국날 공항에서 배웅 나온 마사히로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울고 있는 그를 화장실에서 찾았다.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내가 끼고 있던 '묵주반지'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나중에 꼭 일본으로 만나러 가겠다고. 그래도 10개월 넘도록 여기 Nelson에서 생활을 잘했는지, 아직 수업이 있는 어학교 학생들을 포함하여 많은 친구들이 배웅을 나왔다. 그렇게 그렇게 아쉬움의 인사를 나누고 Christchurch로 가는 경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 너무도 심심한 이곳을 떠나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는데, 이렇게 배웅을 받으며 작별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들에게 좀 미안했다.
안녕 친구들! 안녕 Nel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