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영어에 진심이었다. 너무너무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이 전 글에서 자세히 언급했듯이 '타임지 연구반' 서클에서 후배에게 상처를 받았고, '전국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는 유학파 참가자들의 실력에 억눌려 기가 죽었다. 그러던 차에 서클 동기로부터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본인이 다녀온 뉴질랜드 어학연수 이야기. 뉴질랜드를 다녀온 후 실력뿐만 아니라 자신감이 그녀의 뒤에서 아우라처럼 느껴졌다. 유학이라면 돈도 상당히 많이 들 텐데.. 돈이 없는 나로서는 부모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여러 나라를 찾아보았다. 환율이 가장 싼 곳은 그나마 당시 환율이 대략 1달러에 450원 정도였던 뉴질랜드였다. 1년간 공부를 한다는 전제하에 주판을 튕겨보니 대략 1천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가정 형편도 그리 풍족하지 않던 상황이라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했던 대로 웬 유학이냐는 핀잔을 들었다. 몇 달을 설득하고 때로는 졸라서 승낙을 받았다. 다만 한 번에 큰돈 마련이 어려우니 몇 번에 나누어 송금을 받기로 했다. 군대까지 다녀온 내가 웬만하면 기대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영어를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창피고 뭐고 없었다. 목표로 정한 학교는 뉴질랜드 남섬 Nelson에 위치가 'Nelson Polytechnic'이라는 전문학교였다. 영어 실력 향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어학연수가 아닌 유학을 선택했다. 정규 학과에 입학하여 원어민 학생들과 공부하며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플 점수가 필요했다. 학교에서 원하는 토플 점수는 550점 이상이었고, 무난히 그 이상의 점수를 취득하여 입학지원서를 국제우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입학허가서와 함께 여러 안내 팸플릿이 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진짜 가는구나..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여러 준비를 하여 1996년 2월 어느 날 처음으로 비행기에 탑승하였고, 16시간의 비행 후 뉴질랜드 남섬의 제일 큰 도시인 Christchurch에 도착을 했다. 다시 거기서 경비행기를 타고 2시간을 날아 Nelson에 도착을 했다. 작은 공항에는 나를 기다리는 하숙집 아저씨 '줄리안'이 있었다. 학교에서 사전에 연결을 해준 것이다.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아저씨지만 얼굴의 미소 덕분에 다소 안심을 하면서 차에 올라탔다. 차 밖으로 보이는 이국 풍경. 제주도도 못 가본 나에게는 하나하나가 너무 신기했다. 온통 푸른 산언덕에 가득한 양 떼, 그림에서만 보던 공원 풍경, 나무로 지어진 개성 넘치는 집, 그리고 브론드 머리의 외국인들. 앞으로 1년 동안 이곳에서 정말 열심히 생활을 하여 꼭 성과를 가져가리라 다시 한번 결심을 했다.
하숙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바로 옆이 교회가 있다. 알고 보니 줄리안은 교회 목사였다. 부인과 세명의 어린 자녀들이 있었다. 수입이 필요한 집들은 이렇게 학교과 협력하여 유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내가 앞으로 머물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 그리고 클로짓이 있는 크진 않지만 깔끔한 방이었다. 내가 지불하는 금액은 1주일에 140달러. 아침과 저녁은 그 집 식구들과 함께 먹고 점심은 도시락을 만들어 가던지 먹고 싶은걸 개인적으로 먹는다. 이런 생활을 처음 해보는 나로서는 그 식구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보통 달마다 하숙비를 지불하지만 나는 선뜻 3개월치 하숙비를 드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3월이 되어 입학을 하였다. 4개월간 공부할 코스명은 'Introduction to Business Studies'. 공대생인 나에게는 생소한 경제 관련 학문이다. 클래스에는 총 16명이 참여를 하였고, 나와 인도네시아에서 온 유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호주 또는 뉴질랜드 원어민들이었다. 아주 많이 낯설었다. 백인들 사이에서 아시아인이 공부를 한다는 게 영 적응이 안 되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하리라 결심한다. 선생님이 오시고 첫 수업이 시작이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치러 오신 것이 아니다. 수업 진행 속도가 매우 빨랐다. 아니 나에게만 빠르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각종 인보이스 작성법, spreedsheet 작성법 등등 일반 commercial 상황에 따른 기초적인 지식에 대한 수업이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전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영어권 TV에 나오는 토킹 스피드 만으로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낯선 경제 용어를 섞어가며 불라불라 흘러나오는 선생님의 설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낭패다. 어떡하지? 한국에서 나름 원어민 선생님과 수업을 많이 하여 자신감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원어민 선생님은 영어를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 친절히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하셨다. 못 알아듣는 거 같으면 다시 설명해주시고 주제도 단순하고 쉬웠다. 수업 진행 방식은 더욱 난감했다. 그냥 듣고 노트하고 몰라도 아는척하면 어물쩍 넘어가는 방식도 있었지만, 그룹을 만들어 서로 논의도 하고, 때로는 각자 앞에 나가서 발표도 했다. 얄밉게도 인도네시아 친구는 제법 영어를 잘했다. 친근감도 있어서 클래스 학생들과도 잘 지내보였다. 나는 반대였다. 옆 학생이 말을 걸어오면 어떡하지? 혹시 나한테 뭘 물어봤는데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 큰돈 들여서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는데 왕따가 되는 거 아냐? 여러 가지 걱정이 나의 머리를 눌러 한 없이 작아지고 작아졌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어느 날, 별이 유난히 많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였다. 현재 상황은 최악. 영어를 배우러 왔는데 영어를 배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제학을 배울 수도 없고.. 충분히 듣기와 말하기 능력을 향상하고 싶은데.. 지금의 나의 상황은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려운 그런 환경이었다. 클래스 학생들과 웃으면서 여러 잡다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색깔로 염색을 하고, 피어싱을 하고, 문신을 한 친구들에게 친절한 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딱히 대화의 주제도 없었다. 이런 문제는 하숙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가면 줄리안과 부인이 있었지만 그냥 아주 심플한 'how was school today?' 몇 마디 하면 대화가 단절된다. 영어를 잘 못하는 아시아인을 이해하거나 도와주려는 그런 원어민은 당연히 없다.
두 가지 방법을 채택했다. 하나는 정면승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활용해 모두 파악했다.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집에서 다시 한번 복습했다. 회화를 떠나서 선생님 강의가 무슨 내용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두 달 정도 경제 용어에 대해서 파고 드니 조금씩 강의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클래스 메이트와도 그룹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잘 하진 못해도 앞에서 발표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수업에 적응을 해 나갔다. 또 하나의 방법은 만만한 먹잇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클래스 메이트들 중에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나만큼이나 잘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혼자 벤치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그 친구의 옆에 앉았다. 이름은 'Mark'였다. 다행히 나를 반겨주었고 매일 점심시간이면 같은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점심을 먹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서부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광범위한 대화를 아무런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그 친구 앞에서는 틀린 영어라도 거침없이 이야기를 했고, 마크는 말동무가 필요했는지 그런 나를 전혀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니 듣기와 말하기가 확실히 늘어가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때로는 클래스 메이트들과 Pub에 가서 맥주도 기울이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한 번은 클래스 메이트 중 한 명이 나를 집에 초대했다. 차가 없는 나는 그 친구의 차를 타고 갔는데 양을 키우는 농장이었다. 푸른 들판에 수십 마리의 양이 자유롭게 풀어져 있었다. 양 털을 깎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잠시 후 나에게도 해보라고 가위를 쥐어준다. 흔히 양털은 부드러울 거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더럽고 매우 거칠다. 이렇게 깎은 양털을 호주로 보내서 화학처리를 하여 부드럽게 만들어 다시 들여온단다. 뉴질랜드는 환경보호에 매우 엄격해서 화학처리를 하지 않는단다.
본과 건물 앞에는 작은 또 하나의 건물이 있다. Language School. 나처럼 토플 점수를 받아 유학을 온 것이 아니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어학연수를 온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곳이다. 웬만하면 한국인들과 친구를 만들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는데 외로움은 생각보다 컸다. 수업을 마치고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있는데 내 또래 남자가 걸어왔다. "한국인 맞죠?" 그렇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몇 번 마주치다 보니 친해지게 되었다. 6개월간 있었는데 전혀 영어가 늘지 않는다며 하소연도 한다. 어느 날 나를 자기 하숙집에 초대를 했다. 주인 부부는 미국인이었고 친구인 나를 아주 환대해주었다. 같이 저녁상에 앉았는데 큰 생선부터 소시지, 고기 등등 정말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나를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만찬을 차린 거야?" 친구가 답했다. "아니, 평상시에도 비슷하게 먹어. 주인 부부가 사람들이 좋아서 먹는 거 가지고 돈 아끼지 않아" 내가 물었다. "넌 1주일에 하숙비 얼마나 내?" 돌아온 대답은 나를 아주 놀라게 만들었다. "140달러" 나와 같았다. 내 하숙집에서 보통 저녁에는 치킨과 감자 샐러드가 나오는데, 양을 딱 정해서 주기 때문에 더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 너무 배가 고플 때는 설거지를 하면서 치킨에 남아 있는 고기를 먹을 때도 있었다. 너무 화가 났다. 같은 돈을 내면서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당장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 3개월치 하숙비를 지급했으니 돌려달라 그럴 수도 없고.. 너무 우울했다. 몇 번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별로 개선은 안되었고 괜히 사이만 안 좋아질 거 같아서 기간이 종료될 때까지 참기로 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다른 한국 학생들도 알게 되었고, 이중 여럿은 하숙집에서 나와 함께 집을 렌트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Flatting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자취다. 가끔 주말이면 그 렌트 하우스에서 파티를 했고 초대를 해주었다. 딱히 주말에 할 일이 없는지라 초대를 받으면 좋아라 꼭 참석했다. 음식이나 술을 사서 가면 여러 남녀 학생들이 이미 상을 차려 한잔 기울이며 대화가 무르익고 있었다. 영어를 배우러 먼 곳까지 왔고 최대한 돈이 아깝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했지만, 오후 3시면 끝나는 학교생활과 이동수단도 없는 주말을 혼자서 몇 달간 보내보니 이런 파티가 꽤나 신선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좋은 만남이었다. 이렇게 여러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그중 한쌍의 남녀 학생은 이미 커플이 되어 있었다. 그 커플은 어학교에서 다니면서 한국인 외에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일본, 대만, 홍콩 등등 주로 아시아인들이 많았다. 그들과는 어쩔 수 없이 영어로 대화를 해야 하니 어학교 학생들에게는 학교 수업 외에 영어회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내가 Mark를 이용(?) 했던 것처럼.. 그 커플과 함께 자취를 하는 일본인 학생이 있었다. 이름은 '마사히로'.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내 인생을 바꾸는 꽤나 큰 만남임을 그때는 몰랐다. 난생처음 일본인을 만났다. 지난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에서 교육받은 일본과 일본인. 당연히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수차례 만나 서로의 얼굴을 잘 알 때쯤, 술을 한잔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 무심코 속내를 드러냈다. "I don't like Japanese" 그런데 바로 돌아온 대답이 "I know. I understand" 당황하거나 화가 난 얼굴이 아 아닌 아주 편안한 얼굴로 그리고 정말로 나를 이해하는듯한 눈빛으로 답을 해 온 것이다. 오히려 내가 당황하였고 그 뒤로는 민족적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다. 뭔가 더 알고 싶었다. 영어를 배우러 뉴질랜드에 왔지만,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내가 모르던 것을 알고 싶었다. 특히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서 온 마사히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다행히 오픈 마인드 스타일의 술을 좋아하는 친구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내 친구 Mark도 소개해주고, 낚시도 가고, 다운타운에서 놀기도 했다. 또 그 친구를 통해서 다른 일본인 친구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서로 어울리는 모습, 밥을 해 먹는 모습, 즐기는 모습들이 때로는 문화적 충격으로 와닿았고 때로는 우리와도 매우 유사함이 신기하기도 했다.
2개월이 흐른 뒤 1주일 방학을 맞이했다. 뭔가 모험을 하고 싶었다. 1주일 동안 하숙집에 있는 건 너무너무 싫었다. 줄리안에게 자전거를 빌렸다. 기어가 전혀 없는 그냥 평범한 자전거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거라도 타고 Christchurch를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차로 8시간 거리인데 5일이면 가지 않겠나 싶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타고 오면 될 테고.. 배낭을 준비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짜파게티를 몇 개 넣고 냄비와 휴대용 가스버너도 챙겼다. 그리고는 무작정 출발. 뉴질랜드의 5월은 가을이다. 푸르른 하늘과 가을 풍경을 즐기며 서서히 Christchurch로 뻗은 도로에 진입했다. 온통 양들로 가득한 동산이다. 여기를 봐도 양, 저기를 봐도 양.
그렇게 그렇게 달리다 보니 Nelson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사람도 차도 별로 없는 도로와 동산만이 나를 반겨 주었다. 오르락내리락. 기어도 없는 자전거로 달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팔팔한 나이라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숙집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달리기를 몇 시간, 나 같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숙소를 찾아가니 펜션과 같은 숙소가 아닌 캠핑카들이 수십대 정차를 해 있었고, 그중 한 캠핑카에서 자는 것이다. 난생처음 캠핑카를 보았기에 마냥 신기하고 설레었다. 또한 주인 아주머니의 친절함과 간이매점의 맛있는 음식들이 모험의 첫날밤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엉덩이 꼬리뼈 부분이 너무 아팠다. 어제 그 긴 시간을 뾰족한 자전거 안장에 앉아서 달렸으니 어찌 보면 아픈 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어찌하랴. 그냥 가야지. 아침까지 잘 챙겨 먹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렇게 도로를 따라 계속 달리다 보니 어제보다는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가지 차이점은 20단 이상의 기어를 장착한 여행용 자전거와 그것에 걸맞은 훌륭한 복장을 갖추었다는 거. 내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시골 자전거에 복장은 청바지와 티셔츠.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만 나온다. 내리막길은 그나마 괜찮은데 오르막길을 달리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특히나 head wind 맞바람이 불 때면 오히려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가는 게 더 빠르기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달리다 보니 허기가 졌다. 짜파게티를 끓여먹고 싶은데 물이 없었다. 물만 좀 얻기 위해 농가에 들어갔다. 으리으리한 큰 농가 그리고 그 앞에 큰 동산에서는 수백 마리의 양 떼를 모는 여러 마리의 개들과 트랙터를 탄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집을 발견하여 문을 두드렸다. 아주머니가 약간 놀란 눈빛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라면을 먹을 물을 좀 얻고자 하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크게 웃으신다. 그리고는 집안에 들어와서 끓여 먹으란다. 호의는 고마운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여 물만 얻어 나왔다. 양 떼가 쳐다보는 좋은 그늘에 앉아서 평화롭게 짜파게티를 끓여 먹었다. 당연히 너무너무 맛있었다. 서둘러서 또 출발했다. 도시가 나와야 숙소를 찾을 수 있기에 아픈 엉덩이를 참아가며 달리고 달렸다. 한참을 달리는데 뒤에서 큰 먹구름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완전 비구름이었다. 이 구름의 방향이 공교롭게도 내가 달리는 방향이었고 그 속도가 나보다 빨랐다. 이러다가는 비에 완전히 젖게 생겼다 싶어 더욱 빠르게 달리며 비를 피할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저 앞 큰 나무 중간쯤에 큰 구멍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성인 한 명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는, 영화 속에서나 보던 그런 큰 구멍이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배낭을 안고 그 구멍에 들어가자마자 큰 비가 쏟아졌다. 30분 정도 쏟아지는 소나기였는데, 그때 그 장면과 느낌은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내가 동화 속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 그렇게 소나기를 피한 후 다시 달리고 달려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이번엔 backpakcer들을 위한 공용숙소에 머물렀다. 일반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아주 싸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곳인데, 보통 한방에 이 층 침대가 여러 개 있다. 그중 하나에서 자면 되고, 식사는 키친에서 본인이 알아서 해 먹으면 된다. 이런 숙소의 장점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가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벽한 영어가 아니어도 된다. 어차피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많다. 여행 중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서로에게 친절했으며 키친은 여행 정보 교환에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Christchurch를 가는 도중에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가 있다. 'Kaikoura'. 고래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서 Whale Watching을 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모여든다. 일단은 이곳까지가 1차 목표지점이다. 3일째 되던 날 아침, 엉덩이 꼬리뼈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뿐만 아니라 안 타던 자전거로 이틀 넘게 달리다 보니 다리며 등이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기어가 없는 자전거다 보니 온전히 허벅지 힘으로 페달을 밟아야 했기에 즐거운 여행이 고통의 여행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도 고고~ 오늘은 다른 날보다 유독 더웠다. 땀이 줄줄 흐르고 갈증이 심하게 왔다. 참고 참으며 달리고 달렸다. 시원한 맥주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늘 밑에서 시원한 맥주 한 모금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 오후 3시가 넘을 즈음, 저 멀리 흐릿하게 도시의 형태가 보였다. 저기다! 저기가 Kaikoura. 다리에 힘이 들어온다. 얼른 가서 맥주부터 사 마시리라. 두 시간을 더 달려 드디어 Kaikoura에 도착을 하였고, 슈퍼에 들려 시원한 맥주를 여러 개 샀다. 공원의 그늘을 찾아 앉은 후 순식간에 맥주 3캔을 비워버렸다. 너무너무 꿀맛이다. 그리곤 그늘 밑에 드러누워 일단 쉬었다. 쉬면서 생각을 해보니, 도무지 더 이상 체력적으로 자신이 없었다. 이 속도라면 앞으로 3~4일은 더 달려야 Christchurch에 도착을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래서 플랜 변경. 즐거운 여행이 되기 위해 너무 돈을 아끼지 말자. 그날 밤은 backpacker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자전거를 실어주는 버스를 타고 Christchurch로 향했다. 4시간 정도를 달려 남섬의 가장 큰 도시 Christchurch에 도착을 했다. 사실 뉴질랜드 처음 도착할 때 이 도시 공항에 랜딩을 했지만 바로 경비행기를 타고 Nelson으로 향했기 때문에 도시 내부는 처음인 것이다. 1박 2일간의 도시 여행을 마치고 내 집이 있는 Nelson행 버스에 올라 8시간을 달려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Kaikoura와 Christchurch 도시 관광은 그리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 Kaikoura에 도착 전 3일 동안의 자전거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좋은 경험이었고 가치가 있는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숙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다. 당연히 아주 당연히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학교 친구의 소개를 받아 자취를 시작했다. 방 하나 빌려서 쓰고, 밥은 내가 직접 해 먹는다. 집주인은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이었다. 아주머니와 12살 된 딸, 둘이 사는 집인데 방이 남아 나에게 빌려준 것이다. 아주머니에게 지불하는 돈은 1주일에 70달러.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유학생에게는 좋은 조건이었고 먹는 거야 뭐를 먹던 굶지만 안으면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까다로운 아주머니가 아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자취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가끔 늦은 시간에 여러 명의 손님들이 와서 거실에서 술 파티가 벌어진다. 음악소리, TV 소리가 울리고 남녀가 큰 소리로 떠들어서 잠을 자기가 어려웠다. 한 번은 거실로 나가봤는데 동양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들 여러 명과 여자들도 여러 명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남자들은 선원들이며 여자들은 몸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었다. 12살 된 딸이 집안에 있는데 엄마가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다니.. 이건 마인드가 너무 자유롭다고 해야 하나 오죽하면 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관광으로 먹고사는 뉴질랜드는 일자리가 부족하다. 사회복지는 잘 되어 있어 굶지 않을 정도의 생활 보조금은 나오지만 그 이상의 수입을 얻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다. 그러다 보니 항구도시 Nelson에서는 잠시 머무는 선박과 선원이 부수입의 타깃이 되는 것이다. 서로의 사생활은 존중해야 하기에 참았다. 정 시끄러워 잠을 못 잘 정도면 친한 형에게 연락하여 그 집에서 자곤 했다.
시간이 흘러 4개월간의 코스가 끝났다.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많이 헤매었지만 영어에도 좀 자신이 붙었고, 경제 관련 지식도 얻게 되어 나름 수료증에 애착이 갔다. 그리고 소중한 나의 친구 Mark를 알게 된 것이 또 다른 큰 수확이었다. 처음에는 영어회화 상대로 이용을 할 목적이었지만 서로에게 정이 들어 꽤나 친한 사이가 되었다. 집에 초대도 받았고 목공일을 하는 아버지 공장도 방문을 했다. 다행인 것은 Mark도 코스를 하나 더 다닌다고 했다. 계속해서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라 나로서는 좋은 뉴스였다. 다음 코스는 좀 색다른 분야를 공부해보고 싶었다. 고르고 골라 선택한 것은 'TV and Video Production'. 영상 제작 관련 코스다. 두 번째 코스 및 생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무사히 유학생활의 반을 잘 보낸 것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