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모르는 말, 말을 모르는 마음
요즘에는 말을 꺼낸다는 게 조심스럽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를 의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잘보이기 위해서라지만 나를 의식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온 삶과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진 않은가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원래 말이라는 건 자연스럽게 나의 마음을 묻혀 나오는 것인데 요즘 따라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온다거나 마음에 있는 말과 다른 말이 나오게 된다. 그만큼 오래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마음이 스스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한 말이다. 어떻게 내 마음을 내가 잘 모를까. 가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콩닥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해 고백을 망설이거나 고백에 대한 답을 망설인다. 그러다 몸이 먼저 움직여 마음을 제어해버린다. 그러지 말라고, 혹은 그래도 괜찮다고. 그건 당신과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이기에 얼마든지 풀릴 수 있고, 그것을 풀어내는 화법이 우리들의 이야기, 곧 멜로드라마의 문법인 것이다. 하지만 나와 나 사이에 틀어진 마음을 어떻게 합일할 수 있을까. 산책을 나가고 싶은 마음과 낮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겹쳐서 나가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산책과 낮잠으로 든 예이지만, 마음이 합일을 찾지 못하는 이런 현상이 일상의 모든 구석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행복의 씨는 빠르게 마른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확하지 않으면 걸음은 흐트러지고 숨이 좁아지며 자세를 바꿔도 자신이 불편해진다. 처음엔 그저 일시적인 불편함인 줄 알았던 그것이 점차 빈번해지면 그때부턴 에이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나인데 설마 문제라도 있겠어 싶지만, 외면할수록 커다래지는 불편함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면 그럴 땐 이렇게 차분히 앉아 예전 사진을 찾아본다든지 문장으로 적어가며 한 줄씩 인정해나갈 수밖에 없다. 행복에 흉년이 들었다는 사실을.
어릴 때 나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만나면 그 이야기에 천착하기 보단 오호라 나는- 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냉정한 눈빛으로 그 사람의 참거짓을 판단하기 보단 초롱초롱한 심경으로 그저 그 사람에게 기대며 기대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주변엔 늘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많았고 무슨 일이 있지 않을 때면 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동화책에 나오는 피리부는 사나이 영화에 나오는 음유시인처럼 말이다. 말이 많다기 보단 그저 마음이 벅차서 쉽게 말할 수 있었고 쉽게 들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쉽게 스며들었다(assimiliated). 세상과 나의 터울이 없다보니 니꺼내꺼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고 그래서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마냥 웃을 수 있었다. 웃을 수 있었기에 주고받았다.
행복과 불행이 대치하는 삶의 순간에서도 유독 행복에 정신이 팔려있던 그 시절의 난 어째서 결국 불행에 눈을 돌리게 되었을까.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확고하지만 불행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불안하다. 확고함이 불안함에 전염되었을 때 삶의 시간은 돌아가지 않는 물레방아처럼 곳곳에 메마른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기 보단 불안하다. 어디로 가야한다는 방향이 있다기 보단 무엇(가난, 소외)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먹구름 처럼 밀어내도 돌아온다. 겁을 내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 그땐 20대 내 모습과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웃으며 나아가고 기다릴 수 있었다. 지금은 30대의 내 모습과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웃지 못하고 나아갈 수도 없이 망설이고 있다.
이런 내가 그런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 둘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그 다음을 정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