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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예고편 없는 본편이 있던가

새 해 첫날, 늦게 일어난 사람들을 위한

by 피터

1월 1일, 첫날, 처음을 다짐하는 날,


늦게 일어났고, 다른 사람들이 첫 날을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페이스북에서 만났다.

사람들이 SNS에 자신의 아이디로 첫 마음을 담는 걸 보면, 세상엔 두 개의 첫날이 있는 것 같다.


아침 7시 40분. 강릉 기준 일출 시간으로,

7시 40분에 첫날 떠오르는 새 해를 담는 사람과,

느지막이 10시쯤 일어나 새 해를 담어낸 사람들의 다짐을 SNS에서 확인하는 사람.


새해부터 늦잠을 자면 뭔가 게으른 인생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새해부터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그 아침 고생의 보상으로 내가 일어난 시간쯤엔 잠시 눈을 붙이지 않을까라고 위안을 삼는다. 서로 다른 시간의 분주함을 빼거나 더하면, 결국 동률의 시간이지 않겠냐고. 새 해 첫날의 게으름에 애써 관대하기! 그렇다고 새 해의 기대마저 놓는 것은 아니다.


첫날, 나는 몇 달 전 생각했던 내 앞으로의 인생 하나를 다시 떠올렸다. 이런 예고편이다.


- 어느 동네 중간쯤 언덕길에 작은 빵집을 열었다 -


"빵집은 작지만 따뜻했고, 건강한 빵들이 작은 공간을 채웠다. 대로변의 멋지게 꾸며진 빵집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동네 슈퍼마켓 같은 공간에 갓 구운 빵이 라탄 바구니에 채워졌다.

이 집 빵은 이 동네 사람들에겐 싸게 팔았고,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손님들에겐 정가에 팔렸다. 정가에 산 손님들이 있어 빵집은 유지됐고, 동네 빵 좋아하는 이웃들은 가벼운 가격에 빵을 사 갔다. 왜 나는 더 비싸냐고 묻는 손님들에겐 이렇게 답해줬다.

"손님 덕에 동네 빵 좋아하는 아이들이 좀 싸게 건강한 빵을 삽니다".

동의하는 손님들은 계속 왔고, 그렇지 않은 손님은 오지 않았다. 다행히, 오지 않는 손님보다 다시 오는 손님이 조금 더 많아 빵집은 유지됐다. 동네 아이들은 빵집이 문을 여는 한, 좀 더 싸게 빵을 살 수 있었다.

빵은 느리게 구워졌다. 조금 빨랐다면 더 많은 빵을 만들 수 있겠지만, 건강한 빵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느렸다. 이윤이 많이 남지 않는 느린 빵집 이야기."


빵을 배우는 날엔 이런 예고편을 생각했다. 빵 배우는 주말은 재밌었고, 이렇게 뚜벅뚜벅 배우다 보면 3년 뒤쯤엔 언덕배기 느린 빵집을 오픈할 수 있겠지! 그 3년 뒤를 생각하며 한 장 한 장의 스토리를 쓰려고 했다. 예고편에 기댄 시간이 흘러 그런 빵집을 열고, 동시에 그런 이야기를 담은 빵집 책도 나오면,,, 뭔가 근사하니까.

빵집을 열어 근사한 게 아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예고편을 쓸 수 있고, 그 약속을 지키고, 예고편만큼의 실체가 짠~하고 나와서, 뭐랄까, 예고편에 끌려 본편을 설레게 만나는 그 영화 같은 설정에 혼자서 근사했달까. 본편을 꿈꾸지 않는 예고편이 있을 리 없고, 예고하지 않은 본편은 지켜지기 어렵다.


다시 첫날. 다른 예고편을 하나 더 생각해야 한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라서, 변경된 예고편이 생겼으니까. 이런 시작이다.


- 나는 지역에 내려간다 -


어느 지역에 일할 거리가 생겨 일단 몇 년은 거기 생활자가 되기로 했다. 오랜 서울살이를 뒤로 하고 지역에 가게 됐다는 것, 5촌 2도의 실험, 지역에서의 실패와 가능성... 인생의 변덕이야 그렇다 치고, 어느 동네 언덕 위의 작고 느린 빵집은 어떡하냐고? 물론 그 예고편도 마음에 안고 내려가야겠지. 공교롭게도 새 해 첫날 예고편은 두 장면(지역 생활자+느린 빵집)인데, 살짝 걱정도 든다.

두 씬이 교차 편집되어 근사한 본편으로 이어질지, 아님 예기치 않은 다른 장르가 될지. 이를테면 판타지가 호러가 된다거나...? 어떤 장르이건, 해피엔딩에 가깝기를 희망하면서, 어쨌거나 본편에 다가가는 시간이길 바라면서.


나의 첫 날을 응원하고 싶고, 늦게 일어난 사람들과 함께 질문 하나를 나누고 싶다.


"새 해, 당신의 예고편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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