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야
스무 살이란 대개 그런 존재다. 법적 성인이어서 뭐든 할 수 있는 데다가 상상을 실천으로 옮길 에너지가 있는 힘찬 나이. 그런데 현실감각도 금전도 부족해서 불완전한 존재. 스무 살이었다. 대학 가기 전 우정여행을 떠난 다섯 명의 우리는 보라카이 해변에서 바비큐를 굽겠다며 불을 지피고 있었다. 스무 살이니까.
친구가 블로그에서 봤다던 바비큐장은 막상 가보니 화덕은 둘 중 하나는 누군가 몸에서 나오는 노란 물로 불을 껐는지 지린내가 났고 그나마 남은 하나도 검댕으로 가득한 것이 한눈에 봐도 비위생적이었다. 어딘가 잘못됐다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 마트에서 고기와 불판을 모두 구매한 뒤였으므로 돈이 없었다. 어떻게든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고기를 굽겠다면서 왜 땔감과 불쏘시개를 사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도 안 팔았던 것 같다. 철판도 파는 마트에서 그걸 안 팔았겠냐고 되묻는다면 우리는 스무 살이라 그렇다고 답하겠다.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원시인도 예전에 다 불을 피우고 살았다. 우리는 배운 사람(무려 고졸.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원시인에 비하면 똑똑하기 그지없다)인 데다가 첨단 문명 장비도 있으니 결국 승리하리라.
해변 곳곳에 널린 야자수 잔해를 끌고 와 한데 모으고 그 위에 라이터를 켰다. 아무것도 안 됐다. 해변이라는 장소는 본디 습기가 많다는 사실을 자각하기에 우리는 다소 철이 없었다. 그때부터 자연과의 한판 시작이었다. 사람들이 근방에 버린 쓰레기를 뒤져 땔감용 통나무, 신문지 같은 것들을 모아 불을 붙였다. 되지도 않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다들 지쳐갔다. 그냥 굶는 것도 추억이지 않을까, 내가 중얼거리자 옆의 친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노을 진짜 예쁘지 않아? 잠깐만 사진 찍고 오자. 또 다른 친구가 하늘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 연서가, 아니 연서님께서 계셨다. 지금도 박스 조각을 들고 땀을 뚝뚝 흘리며 현란하게 부채질을 하던 연서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연서는 한순간도 부채질을 멈추지 않았고, 그런 연서님의 맹렬한 손놀림에 맞추어 불길이 차츰차츰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땔감을 가져오겠다며 은근슬쩍 사진을 찍고 놀았던 우리들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연서의 별명은 정이(드라마 불의 여신의 주인공)였다.
우여곡절 끝에 먹었던 그날의 고기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뒤처리를 어떻게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매캐한 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손목 움직임을 멈추지 않던 연서만이 떠오른다.
스스로에게 평가가 후한 편이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그리고 사람 잘 보는(그렇다고 여긴) 내가 겪어 본 바, 연서는 분명 그런 애가 아니었다. 땀 흘리기를 싫어하고 언제나 소독 티슈를 들고 다니며 유난을 떠는 깍쟁이가 연서였다. 여행지에서도 쉬지 않고 수백 장씩 셀카를 찍어대는 게 연서였다. 화려한 네일아트와 반지며 귀걸이로 휘감은 애가 연서였다. 연서와 11년 친구로 지내는 이제 자신 있게 말하겠다. 나는 사람을 볼 줄 모른다.
안 그러려고 해도 나이가 먹을수록 하나를 보면 열을 멋대로 알아버린다. 관상만 봐도 그렇고 타인을 판단하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진다. 솔직히 대부분은 맞는다. 그리고 그중 한두 번은 시원하게 틀린다. 착한 줄 알았던 언니가 알고 보니 뒤에서 자기 이익만 챙기기도 하고 반대로 남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줄 알았던 부장님이 내 입장을 배려해 본인이 희생하기도 한다. 나 역시도 잘못된 평가의 당사자가 될 때가 있다. 아무래도 인간은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는 채 죽는 게 보통인 것 같다.
스무 살을 진즉에 졸업한 나는 적어도 그때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누군가가 물었을 때 버벅거리는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다. 걔가 이기적인 거 맞을까? 막상 모두가 힘든 상황이면 팔 걷고 나서는 사람인지 어떻게 알지? A는 무뚝뚝한 게 아니라 낯을 가리는 사람일 수도 있어. B선생님이 예민한 면모를 가지긴 하지만 그건 가정환경과 관련된 어두운 과거를 건드렸을 때만 욱하시는 거야...
다리 좀 더듬어 본 경험만으로 코끼리에 대해 설명을 맡게 된 장님 같아서 나는 혼란스러워한다. 답지 않게 뜸을 들이다가 시시한 답을 내놓는다. 뭐, 좋은 사람이야, 착해. 너는 도움이 안 된다며 투덜대지만 S야, 나는 너도 잘 모르는걸. 서운하다고? 하지만 너도 아마 나를 모를 거란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