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판에 담기는 청포도 알은 몇 개인가

by 유장래

후천적으로 멀리하게 된 음식들이 있다. 다른 평행 세계의 나는 즐기는 음식일지 모르나 지금 우주의 나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갈치와 포도가 그 주인공인데 둘 다 엄마의 잔소리와 연관이 있다.



갈치는 한가운데 굵직한 가시 하나만 있는 보통의 물고기와는 달리 양 옆에도 가시가 있다. 이 곁가시를 발라내고 나서 중심 가시를 도려내야 깔끔하게 먹을 수 있다. 한마디로 ‘갈치 먹는 법’이라는 게 정해져 있었는데 이를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하면 구박을 받았다. 무슨 살을 이렇게 많이 버리냐, 이빨로 살살 물어라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갈치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다. 겪어보니 그렇다.




꾸중 분야의 최고봉은 포도였다. 엄마는 후식 시간 내내 우리가 버리는 포도 껍질을 검사했다. 껍질에 과즙이 남아있는 경우 다시 먹어야 했다. 건조기에 넣은 듯 쪼글쪼글한 포도 껍질만이 통과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흡입에 영 소질이 없었다. 오래도록 불합격된 포도껍질을 물고 있어야 했다. 껍질에서 풀맛이 날 때까지 짓이기다 보면 포도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거부감이 드는 지경에 이른다. 해보니 그렇다.








청포도는 어느 날부턴가 마트 과일코너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이 껍질째로 먹는 포도는 나의 포도혐오증에 있어 최고의 치료제였다. 씹고 삼키기만 하면 된다니! 나는 사대주의자가 되어 캠벨 포도며 샤인머스캣, 블루 사파이어의 상큼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청포도가 좋았다. 좋아하니까 많이 먹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였다. 어떻게 해야 식판에 포도를 최대로 담을 수 있을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포도알은 동그랗기 때문에 반찬 칸에 얼마 들어가지 않았다. 빈 공간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쌓아 올리면 될 것도 같은데 교사 입장에서 줄 서 있는 아이들을 외면한 채 젠가 놀이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날도 최선을 다했으나 흡족하지는 않은 양의 청포도를 받아와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청포도를 젓가락에 끼워서 포도꼬치를 만들며 즐거워했다. 저렇게 먹을 생각을 하다니 창의적이었다. 아무래도 탕후루를 일찍이 접한 세대라서 저렇게 먹는 게 자연스러운 걸까? 어릴 적의 경험이 참 중요하구나,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보고는 외쳤다.



“애들아, 선생님 봐봐!”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포도알로 저글링을 하거나 공중에 던지고 받아먹기 같은 묘기를 부리지 않았다. 대신 내 식판에는 수북하게 쌓인 청포도 봉분이 있었다. 급식조리사로부터 포도를 네 알씩 지급받은 우리 학생들은 눈빛으로 말했다. 선생님 치사해.




“이게 대체 몇 개야?”


주헌이가 밥을 먹다 말고 내 옆으로 왔다. 자리에 돌아가라고 했으나 이미 주헌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하나에 꽂히면 반드시 끝을 봐야 하는 주헌이는 미술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나를 당황시킨 경력이 있는 아이였다. 뚝심 주헌이는 식판에 얼굴을 들이밀더니 오래도록 청포도들을 노려보았다. 몇 분 뒤 후련한 표정으로 곁을 떠나며 외쳤다.




“선생님 청포도 18개나 있어!”


와 진짜? 아이들이 감탄을 할 때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딱 봐도 10개 초반 정도 될까 말까한 양이었다. 아홉 살의 양감이란. 애초에 투시 능력이라도 있지 않은 한 정확한 개수를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이쯤 되니 나도 궁금해져서 포도를 입에 넣으며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어라?

양감이 부족한 사람은 나(2X세)였다. 청포도는 ‘정확하게’ 18개였다. 대체 어떻게 센 거지? 아래가 보이지도 않는데. 이 정도면 레인맨(1988년 영화: 톰 크루즈 주연) 아니야? 비결이 궁금했으나 물어봤다가는 신이 난 주헌이의 성공담을 그가 만족할 때까지 되풀이해 들어야 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혼자만의 미스터리로 남기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식판에 담을 수 있는 포도알의 개수가 18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포도를 많이 담아야겠다는 집착이 사라졌다. 청포도 열여덟 알 정도면 충분하게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대함에 있어 객관적인 지표를 먼저 확인하고 나서 판단을 내리자는 소중한 교훈을 얻은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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