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과 명당사이
문득 등산모임카페를 들어가 보니 초보자도 환영한다는 ‘릿지공지’가 떴다.
등산인들 사이에서 ‘릿지’는 바위를 타는 행위인데 등산이라기보다는 알파인 클라이밍에 가까운 활동이다.
대장은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초보자들을 잘 이끌어 주시는 무척 신중하신 분이었다.
나는 참석하겠다고 꼬리를 달았다. 다른 동문등산모임에서도 자주 뵙는 두 분의 대학 선배님도 신청을 하셨다. 이 두 분도 암벽이나 릿지 등반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다.
우리 셋은 전철역에서 만나 함께 택시를 타고 5분 거리에 있는 약속장소로 가기로 했다.
연배가 비슷한 선배 한분이 먼저 오시는데 아뿔사! 그 분이 들고 오시는 핼맷을 보고 그제야 내가 오늘 장비를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을 알았다.
나는 그냥 무심히 생릿지(맨몸이나 아주 최소한의 장비로 바위 능선을 타는 것, 은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분명히 최소한 두 세 번은 공지내용을 확인했고 생각해 보니 핼맷이란 단어도 읽었다.
그런데 나는 요즘 다른 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어서 알아서 필터링을 한 모양이었다.
창피하고 난감했다. 게다가 다른 한 선배님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오신단다.
택시로 가는 5분 동안 나는 도저히 이번 활동에 참석할 수 없음을 판단했고 선배에게도 함께 불참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늘은 그냥 저랑 둘이 백운대 다녀오시죠.”
약속장소에 도착해 너무 죄송하다고 여러 번 굽신거렸다.
선배도 나 혼자 보내기 그렇다며 함께 빠지겠다고 말해줬다.
이래서 [어쩌다 둘만 산행]이 시작됐다.
“어휴, 어떻게 해요? 저 사람들이 날 뭐라고 하겠어요?”
나는 사실 오늘 릿지를 잘 해서 대장님께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그런데 폭망한 거다.
여러 번 그런 말을 했나 보다.
“왜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지? 저 사람들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거야.”
“만일 누군가가 저와 같은 상황을 말하면 저도 분명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거에요. 그런데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은 나를 욕할 것만 같은지 모르겠어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데 대체 나는 왜 이럴까요?”
“부처님이 덜 돼서 그렇구만.”
“......”
“저는 백운대 꼭대기까지는 가지 않을래요. 재미가 없더라구요.”
백운대 꼭대기는 엄청 큰 바위덩어리다. 그래서 비탈진 바위를 계속 쇠봉을 잡고 올라가야 한다.
선배는 백운동 암문에서 노적봉으로 향했다.
그런데 선배는 길을 잘 못 찾았다.
“이상하네, 예전에는 쉽게 올라갔었는데, 왜 이렇게 길이 어렵지?”
게다가 어렵게 올라갔는데 길이 없기도 했다. 점심 먹을 즈음이었다.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나는 거기서 쉬어가자고 제안했고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얼마나 명당자리를 만났는지 모른다. 이렇게 잃어버린 길에서 뜻밖의 행운이라니. 신의 한 수였다.
그렇다. 우리 인생이 때론 이러하다. 우연이나 착오에서 건저 올리는 기회나 득템들 말이다.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 만경대와 만장봉은 하나의 대단한 작품이었고 그 꼭대기에서 릿지를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무척 아름다웠다. vip 관중석 같았다. 그리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보이는 그들은 나를 설레게 했다. 그들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나는 엄치척을 높이 들어 보냈다. 환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한 숨 자면 좋겠는데....”
간단히 준비 해 온 음식을 다 먹고 난 후 선배가 말했다.
“오! 제발 주무세요, 전 이대로 좋아요. 나는 사실 그냥 산 속에 이렇게 있는 게 좋아요. 그런데 전 길치이니 사람들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고 그러면 정상을 안갈 수 가 없고 또 바쁘게 내려와야 하고...”
선배는 저만치서 바위에 등을 대고 누웠고, 이내 나지막히 코고는 소리를 들려줬다.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저 아래에서는 도란도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고 새로 돋아난 연두빛 잎들은 유난히 반짝인다. 추임새를 넣듯 새소리가 멀고도 가깝게 들렸다.
나는 바람의 결을 만지고 있다. 북한산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다.
내가 원하던 순간이 이렇게 오다니.
오직 나와 자연만이 마주하고 있는 듯한 이 기분. 북한산은 나를 품어주고 있었다.
'꼭 정상을 가야 해? 여기서 실컷 놀다 가자구.'
나는 그동안 자주 이런 말을 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정상은 꼭 ‘정복’해야 하는 곳이었다.
이 아름다운 풍광의 자연 속에서도 여전히 그들의 의식은 세상살이와 닮아 있었다.
다시 노적봉을 향한 걸음을 뗐다. 그런데 선배는 역시 길을 못 찾았다.
“예전엔 쉽게 올라갔는데, 이상하다.”
“아효, 그 소리 귀에 딱지가 앉겠어요.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 모르시냐구요. 하하”
드디어 어렵게 노적봉에 올랐다. 선배와 나는 인증샷을 찍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다른 성취감에 젖어 있었다.
“오늘 동행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해요. 하산 하면 제가 저녁 살게요.”
나는 마음속으로는 ‘10인분도 기꺼이 살 수 있어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