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는 지난 3개월간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
특히, 나는 엄마를 다치게 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려 내 마음은 매일 같이 지옥이었다.
그날 나는, 엄마 아침식사를 챙기지 못했는데, 엄마는 생선을 구우시다가 손가락 끝을 크게 데이신 것이다.
엄마는 오래된 당뇨로 손끝 발끝에 감각이 거의 없으시다.
그런 손으로 뜨거운 팬을 계속 잡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점심때서야 알았다.
엄마는 통증이 없으셨고 나중에 보니 손가락 끝이 올챙이처럼 동그랗게 부풀었다며 나에게 보여 주셨다.
나는 너무나 깜짝 놀랐다.
‘아, 또 이런 일이!‘ 미칠것만 같았다.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이런 사고로 엄마는 왼쪽 검지손가락이 없다.
그 때는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때라 바로 조치를 못했고, 엄마는 아프지 않으니 ‘괜찮다’ 하셨으며,
데이고 낫고를 반복하시다가 어느 날 손가락 끝에 괴사가 온 것이다.
대학병원에서 괴사를 잡지 못해 엄마의 손가락 절단 수술은 3, 4번에 걸쳤다.
그 때의 악몽도 채 씻기지 않았는데, 또 손가락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내가 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상전문병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응급의학과로 갔다.
젊은 의사가 기겁을 하면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며,
우리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A화상 전문 병원을 알려 주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라며.
“호들갑 떠는 거야.”
엄마는 애써 침착하게 말씀하시며 나의 혼비백산을 잡아주셨다.
A병원에서 나와 엄마는 의사에게 부푼 손가락의 물집을 터트리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렇게 부풀었던 검지손가락이 그냥 자연스럽게 아물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약만 발라주고 '결국엔 물집을 터트려야 하고 손가락도 자를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엉엉 울고 싶었다. 엄마의 손가락을 또 잃고 싶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너무나 절박해졌다.
다음날은 투석을 하시는 날이었다. 엄마가 투석센터에 가신 후 투석센터에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동네에 화상전문의원이 있으니 그리로 가보라고. 다행이었다. 가까운 곳에 화상전문병원이 있다니!
의사선생님은 매우 친절하셨다. 그렇지만 우리의 요청에는 신경도 안 쓰고 과감히 물집을 터트렸다.
“집에서야 물집을 터트리지 않는 게 맞는 방법이지만 병원에 오셨으니 더 빨리 회복되는 방법을 선택하셔야죠.”
그의 단호한 행동에 우리는 아무 말도 못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 또한 손가락 끝을 조금 자르게 될 것 같다 하셨다.
의사선생님은 고압산소치료를 추천했다.
나는 엄마의 손가락 끝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쇠약하신 엄마는 고압산소치료를 견디지 못하셨다.
나는 너무나 안타깝고 매일 매일이 절박했고 고통스러웠다.
‘안돼요. 이번에는 절대로 엄마 손가락을 잃지 않을 겁니다.’
일주일에 세 번씩 꾸준히 드레싱을 하러 다녔다.
의사는 내 엄마를 정말 가족처럼 돌봐 주셨다.
그 분의 말투는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한지 모른다.
엄마도 ‘평생 다녀 본 병원 중에 최고’라고 하셨다.
간호사들도 자신이 다닌 병원 중에 최고라고.
의사가 이제는 큰 병원에 가 보셔야 한다고 했다.
엄마의 검지손가락을 결국은 다 잘라 낸 그 병원에 다시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이었고 엄마의 그동안 병력 기록이 있는 곳이었다.
결국 자른다는 진단이 나왔다. 나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1주일 후에 오라며 해 준 드레싱은 내 맘에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빨간약만 발라준 것이다.나는 다시 동네 화상병원에 갔고, 의사에게 절절한 마음을 토로했다. 의사는 좀 멀지만 화상전문 최고의 B병원을 소개해 주고 의사선생님도 연결해 주었다.
밤잠을 설치고 예약도 못하고 이른 아침 찾아 간 B대학병원의 의사선생님은
“네, 얘기 들었습니다.”라며 내 어머니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그 분은 진료 보는 내내 자신의 치료 방법과 연결지어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가족이야기를 하는 등 놀라운 친화력을 보여주셨고, 어떻게 치료를 진행할 건지도 자세히 말씀해 주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피부이식이나 손가락 끝을 조금 자를 수 있어요. 뼈가 이미 보이거든요.”
하지만 나는 마음이 스르르 풀리며 왠지 희망이 생겼다. 엄마와 나는 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집에서 드레싱 해도 된다며 메디폼을 한 꾸러미 처방해 줬지만,
나는 동네 화상전문의원에서 계속 드레싱을 했다. 철저하게 관리하고 싶었다.
2주일에 한번 오전 7시에 출발해서 첫 환자로 B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동네 병원에서도 꾸준히 진료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두 의사 선셍님의 내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같이 기도하는 세 달이 지났다.
대학병원에서는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 했고, 동네 병원에서 계속 드레싱은 이루어 졌지만,
엄마의 손가락은 살이 제대로 차올라 자르지도 피부이식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살면서 의사선생님 만나고 싶어서 진료가 보고 싶은 병원은 처음이었다.
B대학병원은 이미 고객 만족도가 1위인 병원이었고, 병원도 너무나 청결했다.
그리고 내 어머니를 진료해주신 그 선생님이 병원장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제야 검색을 해 보니 그 분의 기사는 매우 고무적이었고 그렇게 소명의식이, 인간미가 넘쳤다.
잔뜩 겁먹고 긴장하고 있는 환자와 보호자를 마음을 스르륵 열게 해주는 그 분의 다정한 이야기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다들 잘라야 한다고 말했던 손가락이 아닌가?
더 놀라운 건 병원장님도 동네 의사 선생님도 내 어머니의 이런 호전을 솔직히 기대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나는 선물을 들고 다시 새벽같이 B병원을 찾아 갔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따로 이런 용건의 사람을 만나 줄 리 없으니,
첫 진료 보시기 전에 잠깐 뵙고 선물만 드리고 올 생각이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걸어오시는 선생님이 보인다. 나는 냉큼 달려갔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신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어머니가 선생님 덕분에 잘 나으셨어요. 너무나 감사드려요.”
“아, C선생님의 환자시죠? !$%#$JHRR&*^%$$@.”
“아니요, D선생님께서 보내셨던 환자요.”
나는 재빨리 우리 동네 의사 선생님의 존함을 알려 드렸다.
그리고는 내심 실망을 했다.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시는구나.
진료 시간 내내, 웃음 가득 이야기가 오갔는데. 이럴 수가!
하지만 곧 괜찮았다.
그 분이 어떻게 수많은 환자의 보호자까지 기억할 수가 있겠는가.
진료시간에 ‘진심으로 돌봐 주신 것’만으로 나는 바랄 것이 없어야 한다.
병원장님, 기억하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당신의 직업 정신을 추앙합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더 많은 환자들에게 선생님의 인술이 닿기를 바랍니다.
[한달 전에 써 놓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