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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시나들과 할머니 생각

by HoA
칠곡 가시나들 포스터

올리비아와 남편을 시댁에 보내 놓고 오래간만에 한가한 토요일 밤이다. 제이미에게 무제한 유튜브 시청권을 주고 나는 나대로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 케이블티브이로 영화를 검색했다. 언젠가 한 번 봐야지 마음먹고 도통 짬을 내지 못했던 '칠곡 가시나들'이란 영화를 골랐다.

여든 넘어 한글을 배우는 시골 할머니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저 편히 누운 채로 아무런 긴장도 계산도 할 필요가 없는 영화를 고르고 싶었을 뿐이다.

소개 영상 속 할머니들은 요즘 도시의 멋과 부티가 흐르는 노인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진짜 할머니들이었고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와 너무 닮아 있었다.

우리 할머니도 영화 속 칠곡의 늙은 가시나들처럼 얇은 색종이를 주먹으로 꼭 쥐었다 편 것처럼 꼬깃꼬깃한 주름이 얼굴에 한가득이었고 붉거나 푸른 잔꽃무늬가 자글자글한 저고리를 입으셨더랬다. 그래도 그리 궁상스럽지는 않았고 나에겐 늘 넉넉했으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내 몸과 마음의 쉼자리가 되어주셨다.

국민학생 시절 나는 경기도 부천에 살았는데 여름방학이면 바다가 코앞에 있는 여수 할머니 댁으로 가서 지내곤 했다. 그것이 나에겐 여름의 시작이자 끝이었으며 고향의 기억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맏손녀이자 집안의 유일한 손주인 내 사진을 천장 바로 아래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걸어두고 나중에 커서 최고 높은 사람 돼라 하시던 할머니는 다른 사람에겐 억센 촌로였지만 내겐 늘 바다처럼 넓은 사람이었다. 이불을 노상 발로 걷어차는 손녀딸이 모기에 물릴세라 당신의 삼베 치마를 뜯어 홑이불을 만들어 덮어주고는 잠이 들 때까지 아니 어쩌면 잠든 후까지 부채를 부쳐주시던 분이었다.

칠곡의 늙은 가시나들처럼 우리 할머니도 글을 몰랐는데 내가 스케치북에 할머니 이름을 크게 쓰고 따라 써보시라고 하면 평생 밭일 물질로 거칠어진 뭉툭한 손으로 연필을 꼭 쥐고는 그림을 그리듯 이름을 또박또박 쓰시며 글자를 아는 영민한 손녀를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렇게 촌스럽던 우리 할머니는 '이정희'라는 고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

칠곡 가시나들을 보는 동안 문득문득 우리 할머니가 오버랩되며 마음이 따뜻하다 울컥하다 애잔하기도 하다가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삼년 치매를 앓으며 우리 엄마를 고생시키시다가 여든을 가까스로 넘기고는 크리스마스날 홀연히 돌아가셨다.

서른이 넘은 손녀에게 할머니의 죽음은 그리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고 그 후로도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일하느라 부산스러운 삶 속에 할머니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갔다. 그저 아주 가끔씩 나를 유난히 예뻐하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아이들을 보며 얼마나 흐뭇해하셨을까 상상해보며 아쉬워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내 기억 속 할머니 부활시켰고 그리운 마음은 고마움으로 귀결되며 다시금 마음속에 새겨졌다.

할머니가 사랑한다는 말을 내게 해줬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할머니가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그런 단어를 한 번도 써보지 못해서일 거라 생각한다. 할머니가 내게 해주었던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부족함을 갖고도 스스로를 인정하고 애정 하는 것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이 내게 조건 없이 그리고 무한히 쏟았던 사랑, 그것 말고는 근원이 없다. 그다지 편한 삶을 살지 못했음에도 할머니는 더 살고 싶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칠곡 가시나들처럼 느지막이 찾아온 삶의 여유를 행복으로 여길 줄 아는 긍정적인 분이었던가보다. 일생 엄마를 시집살이로 고생시켰던 할머니지만 나는 할머니를 미워할 자격이 없다. 엄마도 이미 그녀를 용서했고 내겐 남은 할머니와의 추억은 온통 따뜻함 뿐이다.

칠곡 가시나들의 남은 삶이 여전히 재미나기를 빌며

우리 할머니에게도 이 말을 꼭 전해드리고 싶다.

"할머니, 손녀가 할머니 바람대로 최고 높은 사람은 못되었지만 예쁜 아들 딸 낳고 고생도 안 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요. 할머니가 더 살고 싶었던 삶까지 제가 행복하게 살 테니까 지켜봐 주세요. 할머니의 좋은 점만 닮아 경우 바르고 당당하게 살아갈게요. 할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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