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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by HoA
정재찬 교수-'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중


"돌아보니 인생은 나를 돌봐준 이와 내가 돌볼 이로 이루어진 돌봄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우리 엄마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일평생 남을 돌보기만 하며 살아온 '돌봄의 화신'같은 사람이다.

처녀 적 일은 알 수 없지만 엄마는 5남매 장남인 아빠와 결혼하며 본격적인 돌봄의 세계로 들어섰다. 처음엔 맏며느리 신분으로 초등학생 시누이와 중학생 시동생을 거두는 일로 시작했다.

내가 태어난 후에도 시집살이는 계속되었고 대식구를 건사하며 산 것도 모자라 선장이었던 시아버지의 배를 타는 뱃사람들까지 살피며 살았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그 집은 식구들과 친척들과 이도 저도 아닌 객식구들이 뒤섞여 쉴 새 없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엄마에겐 체험 삶의 현장이 매일 반복되는 공간이었다.

겨우 그곳을 벗어나 서울로 상경한 후에는 외동딸이자 유일한 돌봄의 대상인 나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는데 나라는 존재는 엄마의 관심과 미적 재능을 투자한 집약체이자 상징 같은 것이었다. 그 덕에 나는 학교 갈 때 똑같은 머리 스타일을 이틀 이상 반복하지 않았고 구슬이나 레이스 따위의 장식물이 없는 평범한 양말을 신지 않았으며 학기마다 다른 책가방을 맸다. 그다지 예쁘게 생긴 아이는 아니었지만 나는 엄마 덕분에 늘 반들반들 광이 났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아이였다. 여선생님들이나 동네 아가씨들은 엄마가 내게 사준 소품이나 옷가지를 두고 엄마가 이거 어디서 사줬느냐 묻기 일쑤였고 나는 엄마가 만들어준 특별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서 나는 성인이 되었고 엄마 손길이 덜 필요하게 되었을 무렵 엄마는 타고난 돌봄의 기술을 강아지나 식물에까지 나누었다. 엄마는 금손이어서 우리 집에서는 개도 꽃도 나무도 모두 윤기 있고 탐스럽게 자라났다.

나는 결혼할 때까지 엄마 그늘 아래 살았고 나의 출가는 드디어 엄마에게 자유의 시간을 허락하는 듯했지만 그 시간은 결코 길지는 않았다. 치매 걸린 할머니가 엄마의 공간에 합류했고 지긋지긋한 돌봄의 일상은 리셋, 아니 더욱 강화된 형태로 다시 시작되었다.

몇 해 후 할머니의 죽음과 나의 출산이 오버랩되었고 어설피 잘 키운 딸은 사회로 돌아가며 그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엄마 손에 맡겼다. 엄마의 지극한 돌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혔으리라 믿었던 양육의 재능이 안타깝게도 내겐 없었다.

양육은 본능이라는 섣부른 자신감이 산산이 깨졌고 우리 엄마는 타고난 재주에 경험까지 쌓인 돌봄의 달인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아이와 살림을 온전히 의탁했다.

그런 시간이 꽤나 길어지며 나 때문에 그리고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남편과 아이들 때문에 끝없이 희생하는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시시각각 일고, 그것을 알면서도 해결책을 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짜증스러운 날이 많다. '내가 엄마 노릇을 해볼 테니 엄마는 이제 스스로를 돌볼 시간을 가지세요.'라는 말을 끝끝내 하지 못하고 점점 약해져마가는 엄마 품의 다 큰 아기 노릇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엄마는 온 힘을 다해 일생을 다 바쳐 나를 그리고 내 인생을 돌보았다. 정작 당신은 엄마를 일찍 여의고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살았지만 자식뿐만 아니라 당신이 살필 수 있는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끼며 순간 순간을 충실히 살고 있다.

정재찬 교수의 책에서처럼 인생이란 것이 나를 돌본 이와 내가 돌볼 이로 이루어진 돌봄의 연속이라면 이제는 엄마가 보살핌을 받아야 할 때다. 부디 더 늦기 전에 엄마를 돌볼 수 있는 힘이 내게 주어지기를, 엄마가 의지할 수 있는 단단한 자식이 되기를, 엄마가 나를 돌보았듯이 나도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기를 나직이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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