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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A Feb 07. 2022

사랑은 가도 친절은 남는다

하루키와 커트 보네거트와 나

일요일 오후 둘째와 티 카페에 갔다. 주말만이라도 커피를 덜 마시려고 카페인 없는 히비스커스를 주문했다. 재미가 없을 거라고 티 카페는 키즈카페가 아니라는 만류에도 아이는 굳이 나를 따라오더니 무릎에 앉혀달라, 시시하다, 음료가 맛이 없다 칭얼대다가 이내 내 곁에서 조용히 잠이 들었다. 카페 벽장에는 이런저런 책들이 꽂혀있었다. 긴 시간이 허락되지는 않았기에 그중 가벼운 하루키의 산문집을 골랐다. 하루키... 역시는 역시다. 오랜만에 만난 하루키의 글은 경쾌하지만 경박하지 않았고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언제나처럼 술술 읽히며 개운하게 넘어가던 가운데 어느 페이지엔가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속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었다. "사랑은 가도, 친절은 남는다."

살아보니 진정 사랑은 흘러가버린다. 한 때 열렬했던 마음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감정이 행복이었는지 기쁨이었는지 그리움이었는지 집착이었는지조차 애매할 정도로 미적지근해져 버린다. 사랑했던 기억은 있지만 감정의 농도나 색깔은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희미하게 바래고 다.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지만 실로 그러하다.

다만, 보네거트의 말처럼 누군가 내게 베풀었던 친절의 기억만이 오롯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학창 시절 두꺼운 전공서적을 빼앗아 "이런 거 배워 어디다 쓰느냐" 궁싯대며 강의장까지 들어주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밤늦은 시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한참 먼 길을 다시 돌아가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누가 복잡하게 얽힌 생선가시를 깨끗하게 발라 밥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는지, 기진맥진했던 어느 여름 삼계탕 한 그릇 먹으러 가자고 말해준 이가 누구였는지... 그런 기억은 사소하지만 끈질기게 생존하여 사랑의 증거로 남는다.

다행인 것은 사랑에 관한 한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에 비해 그다지 선명하지도 오래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한 시절 누군가로 인해 울고불고했던 처절한 역사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땐 그까짓 게 뭐라고..."하고 되뇌게 되는 사소함으로 퇴색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슬픈 기억보다는 대개 좋았던 기억들을 두고두고 추억하며  웃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루키와 보네거트 덕분에 오랜 기억 속 여러 사람들이 소환되었고 잠시나마 행복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나 역시 친절한 아내, 친절한 엄마, 친절한 딸, 친절한 동료, 친절한 아줌마, 친절한 사람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아이는 내 무릎을 배고 곤히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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