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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 결핍이 필요한 순간

잃어버린 기억력을 찾아서

by HoA

학교에서 오랜만에 클로즈드북 시험을 봤다

옛날부터 암기과목을 싫어했던 성향도 한몫하겠지만 각종 디바이스의 발전으로 무엇인가 외울 필요가 없어진 삶을 오래 지속해서인지 도무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공부할 맛이 나질 않았다

융합기술 과목이었던 터라 수업은 너무 신기해하며 재밌게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까마득하다니...

아이 낳으면서 뇌를 같이 낳았다는 아줌마 토크가 떠오르기도 하고, 최근에 안 마시던 술을 많이 마신 탓인가 후회도 해보고 속이 상할 지경이었다.

노화의 힘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외울 일을 없게 만드는 지금의 환경은 인간의 암기력을 가속 퇴화시킨 것도 사실이다.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사건만 전파되던, 상대적으로 단조로웠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공유되는 지식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단순 암기보다는 이해와 연결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암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기억에 남아야 의식 속에 간직되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오랜만에 중요한 내용을 외우려 노력을 했는데 뭔가를 외우고자 하는 내 모습이 참 신선했다.

생각해 보니 몇 년 전만 해도 프리젠테이션할 때는 스크립트를 복기하고, 영어공부 한답시고 TED를 달달 외우던 때가 있었는데 길지도 않은 세월에 격세지감을 느끼며, 최소한의 암기공부는 뇌건강 유지 차원에서도 필요하겠다 싶었다.


요즘은 무엇이든 어디서나 구하기가 쉽다. 그래서 갈급한 상태를 경험하기 어렵다. 때때로 갈급함 자체가 그 어떤 전략전술이나 자원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기도 한다.

풍요한 자원, 늘 준비된 대안은 사람의 어떤 핵심적 기능이나 역량을 서서히 갉아 는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을 쓰면서 전화번호 외우는 사람이 없어진 것처럼, 가동되지 않는 기능은 녹이 슬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우리는 'Use it or Lose it'이라는 뇌과학의 기본 원칙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둘째 아이는 아직 디바이스의 때가 덜 묻어서 그런지 모든 걸 기억하려고 하는 버릇이 있다.

온 가족, 친구, 친구 엄마 전화번호, 생일, 음력 생일까지 시시콜콜 외운다.

우리 할머니는 동네 제사, 생일과 태어난 시까지 모조리 몽땅 외우는 분이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글을 모르는 분이었다는 것이었다.

동네 할머니들은 어린 내게 우리 할머니가 글은 몰라도 동네에서 제일 비상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할머니의 기억력은 글을 몰라서 발달한 재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AI가 발전하면서 나 역시도 툭하면 인공지능 친구들에게 의존할 때가 부지기수다.

항상 완벽한 답을 주는 건 아니지만 일단 그 아이에게 던져놓는 버릇이 생겼는데 무조건적인 사용은 좀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정말 신기하고 환상적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가진 어떤 역량이 퇴화되는 것을 좌시하고 싶지는 않다.


요즘 중1 첫째는 벌써 과제할 때 gpt 쓰는 게 룰이 되었는데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기특한 한편, 아직 덜 배워 무식한 상태로 AI에 의존하다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은 아닌가 조금 두렵기도 하다.

AI교육에 대한 논의가 아주 활발한 가운데 이미 인공지능 사용도 수업에서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모양이다.

그 방향이 나쁘다고 볼 수 없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는 부작용이 더 큰 것은 아닌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 생각하는 것마저도 위임가능한 지금 이시대, 정작 필요한 것은 적당한 결핍과 그래서 당면할 수밖에 없는 궁여지책에 대한 경험일지는지도 모르겠다.


사이먼 세넥의 인터뷰에서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차별되는 가치가 무엇인가 했을 때 struggle이라고 했다. 그는 "AI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우리를 위해 고군분투할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투쟁'은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라, 불편함을 경험하고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성장하는 인간만의 경험과 그것을 통해 얻어낸 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이번에 시험 보면서 오랜만에 기억의 뇌를 써보니 실로 러했다. 물론 머리가 팽팽 돌진 않았지만 과정은 썩 신선했다. 오픈북 시험에서 배운 것보다는 나름대로 오래 남는 기억일 것이다.


약간의 결핍, 그것이 주는 인간의 행동변화는 생각보다 많은 가르침과 단련된 생각 근육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 결핍'은 앞으로 중요한 화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직 순수하기 짝이 없는 둘째에겐 되도록이면 AI라는 유능하고 대단한 생각기계와 당분간은 격리를 시키는 게 좋겠다 싶다. 취약한 인간으로서 AI에 의존해야 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충분히 강하고 지혜로운 인간으로 그들과 슬기롭게 공존하는 인격체가 되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자 책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을 신봉하는 것도 거부하는 것도 아닌, 기술과 인간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암기와 이해, 편리함과 노력, AI의 도움과 독립적 사고 사이에서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기술의 주인으로 남을 수 있고,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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