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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하지 않는 그대에게

염치가 문제인가 포악한 환경이 문제인가

by HoA

얼마 전 소비자로서 겪은 두 차례의 불쾌한 경험은 나에게 '사과'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추석 선물로 주문한 참기름은 약속된 도착일을 훌쩍 넘기고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문의 끝에 돌아온 답변은 "주문이 많아 신선한 기름을 짜느라 늦어진다"는 변명뿐,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사과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은행의 대출 연장 안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장 당일에야 날아온 문자에는 금리 정보조차 없었고, 전화로 확인한 금리는 이전에 안내받은 것보다 훨씬 높았다. 직원의 계산 착오라는 명백한 실수였지만, 돌아온 것은 사과가 섞이지 않은 구차한 해명이 전부였다.

사람이기에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배송이 늦어질 수도 있고, 복잡한 숫자를 잘못 계산할 수도 있다. 내가 분노하고 실망한 것은 실수의 발생 자체가 아니라, 그 실수를 대하는 무책임한 태도였다. 그들은 왜 그토록 사과에 인색했을까? 아마도 사과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이 확정되고, 그로 인해 파생될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과를 '패배의 인정'이나 '논쟁의 종결'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사과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진정한 사과는 '내 잘못입니다'라는 죄의 확정이 아니라, '문제를 바로잡겠습니다'라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것은 상대방이 겪었을 불편과 피해를 공감하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책임감 있는 첫걸음을 내딛겠다는 약속이다. 문제가 발생했음을 인지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신뢰의 메시지인 것이다.

변명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습관은 위험하다. 당장은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잘못에 둔감해지고 더 큰 실수를 용납하는 태만함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양심을 흐리게 하고, 타인의 신뢰를 잃게 만들어 결국 사회적 관계를 병들게 한다.

이런 일이 왜 발생하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사과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미안하다'는 말이 가져올 부정적 결과 때문일 수 있다는 데 공감했다.

어떤 불편한 일에는 대개 여러 요인이 개입되게 마련인데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사과'라는 행위는 원죄의 시인과 동일시되며 그로 인한 책임이 오롯이 전가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잘못을 시인한 사람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회가, 옳다구나 하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인색한 사람들이 미안한 마음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학폭사건에 휘말렸을 때 절대로 사과하지 말라는 지침, 회사에서 실수했을 때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는 순간 낙인과 함께 모든 수습을 해야한다는 부정적 학습효과가 사람들로 하여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도 사과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염치에 둔감해진 사람들, 어떻게든 책임을 분산시키려는 꼼수, 타인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사람들을 만든다.

세상에는 사과하는 사람의 선의를 약점으로 삼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두려워 마땅히 해야 할 사과를 외면하는 것은, 순간의 자존심을 지킬지는 몰라도 결국 스스로를 더 옹졸한 인격체로 만들 뿐이다.

사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책임지려는 용기다. 우리 사회가 이제는 그 용기를 응원하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하나의 실수가 곧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잘못 그 자체에만 매몰되기보다,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과 책임지려는 태도를 더 귀하게 여기는 성숙한 문화가 자리 잡기를 소망한다.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 그리고 그 용서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사회. 그 안에서 사과는 더 이상 패배의 언어가 아닌, 더 나은 내일을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가장 진솔하고 힘 있는 약속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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