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뀨어라운드 Jul 16. 2024

포켓몬 사다리 게임

육아 참 어렵다

'포켓몬 사다리 게임'의 정체


아이가 두 달 전부터 즐겨 하는 보드게임이 있다.

이름하여, '포켓몬 사다리 게임'.


주사위를 굴리고 말을 움직여 결승점에 도착하면 이기는 단순한 게임이다.



집에 있는 다른 보드게임들처럼, 

몇 번 하고 말겠지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사줬는데,

이걸 매일 하고 있자니 지치기 시작했다. 


아이는 매일 아침,

"포켓몬 사다리 게임하자!"

외치며 엄마 아빠를 깨웠다.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은 아침 먹기도 전에, 

게임 두 판은 해야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었다.


상자와 게임판은 벌써 군데군데 접히고 헐었고,

종이로 만든 포켓몬 말들도 

모서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좋아하는 물건이 이렇게 닳아도, 

속상해하진 않는다는 것. 


그저 즐겁게 게임을 할 뿐이었다.



나는 보드게임카페 알바였다


대학교 다닐 때, 

참 다양한 아르바이트들을 했었는데,

그중 하나가 보드게임카페 아르바이트였다. 


당시만 해도

보드게임방이 있는 곳이 별로 없었고,

사람들이 굉장히 신기하게 보던 때였다.


그때까지 해본 거라곤, 

장기와 부루마블밖에 없던 생초보였지만,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었기에 

면접을 보고 일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는 1년을 넘게 계속했는데,

그러면서 100여 종의 보드게임들을 배우고,

또 손님들에게 설명해 줬던 것 같다.



검은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에게 집중한 손님들에게,

'너넨 이거 모르지??' 하며

게임 룰을 설명할 때면,

알게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었다.


가끔 손님이 적은 날이면,

단골손님 테이블에 같이 앉아서,

함께 보드게임을 하기도 했었다.


배우고, 놀면서 일하고, 돈도 받고,

꽤 괜찮은 아르바이트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디지털 영상이나 게임이 아니라,

보드게임에 이리도 집중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니,


'이제 보드게임도 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구나'

'그래 컴퓨터 게임보다 이게 백배 낫지'


흐뭇한 기분만이 가득했다.



'포켓몬 사다리 게임'이 싫어졌다



그런 기분도 잠깐.

나는 이 게임이 왜  '권장 연령 만 6세 이상'으로 쓰여있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에 원하는 말을 정하느라, 

가위바위보. 내가 이겼다.


"아빠! 피카추랑 꼬부기는 내 거야. 아빤 이상해씨랑 파이리해!"

"싫은데? 아빠도 피카추랑 꼬부기 할건데?"

"그건 내 거야!! 아빤 다른 거 해!!"

"싫은데?"


싸움이 시작됐다.


그다음엔 누가 먼저 주사위를 던질지, 

가위바위보. 또 내가 이겼다.


"자 아빠부터 굴릴게!"

"아냐 주사위는 나부터 굴릴 거야!"

"아빠가 이겼잖아!"


"그래도 내가 먼저 할 거야!"


게임은 언제 시작할 거니.


겨우 사태를 진정시키고 주사위를 다시 굴려본다.

아싸, 사다리를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칸에 도착했다.

(게임판에서 이동할 수 있는 칸은 총 100개다)


아이의 입이 점점 나오기 시작한다.


- 또르르륵


아이가 주사위를 굴렸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칸에 도착했다.

아이의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인다.

나는 이때부터 마음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한다.


이대로 내가 이겨버리면 또 성질을 낼 텐데...

제발 이번 주사위는 미끄럼틀 칸에 걸리는 숫자이기를 빌며, 다시 주사위를 던진다.


큰일 났다.

먼저 결승점에 도착해버렸다.


다행히 각자 말을 2개씩 가지고 시작했기에,

내가 두 번째 말로 게임을 다시 시작하는 동안,

아이가 분발해 주기를 기도해 본다.


하지만 내가 크게 앞선 채로

게임은 끝나버렸고,

아이는 화가 잔뜩 났다.


아빠가 룰을 어겼다는 둥 

근거 없는 이야기로 성질을 내다가,

아빠가 안 받아주니까

방에 들어가 버린다.


나는 오늘 참 바라지 않게도

운수 좋은 날이었음에 

속으로 한탄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음을 진정한 아이가 나와서 다시 외친다.


"한 판 더 하자 아빠!"


그런데, 또 내가 이겼다.



어린이 장기계의 고수


아이와의 한바탕 싸움을 한 후,

나는 어렸을 때 어땠나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초등학교 때였다.


반에 장기 열풍이 불었다.

다들 가방에 미니 장기판 하나씩을 들고 와서,

점심시간, 쉬는 시간마다 대결을 했다.


이기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나무 장기판을 꺼내서,

혼자 장기를 뒀다.


내가 한 알, 가상의 상대가 한 알.

그렇게 혼자서 상상 속 역할 놀이를 하며 

장기를 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6시에 일어나,

TV를 조심스레 켜고, 

장기 대국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얼마 후, 나는 우리 반 장기 서열을 평정했다.



육아, 참 어렵다


포켓몬 사다리 게임.


운으로만 이뤄지는 이 승부 속에서 벌어지는 감정적인 상황들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가위바위보와 상관없이

아이가 원하는 말을 정하려고 할 때,

내 마음속에서는 싸움이 벌어진다.


'그냥 그러라고 할까?' vs. '안된다고 하자. 집에서 계속 이러면, 유치원 가서 친구들이랑 싸울 거야.‘


게임을 이기고 있을 때,

또 내 마음속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지면 또 성질을 낼 텐데... 져줄까?' vs. '지는 것도 해봐야 성장하지'


이 5천 원도 안되는 종이 게임을 두고,

우리 가족은 한 달 동안 웃고 화내고 즐거워하고 (주로) 울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아이와의 싸움이 매일 같이 반복되면서, 마침내 이 애물단지를 책장 위 한켠에 봉인해버렸다.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만나서 힘들었고, 

다신 만나지 말자 피카츄.


매거진의 이전글 너 하고 싶은 만큼 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