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유독 피곤한 날이었습니다.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더 자려고 다시 눈을 감으면서도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아이고 죽겠다...'
평소엔 자다가 깨면 그냥 비몽사몽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잠들었는데, 이날은 온몸이 "나 피곤해!!"라고 제게 외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이고 피곤해 아이고 피곤해'를 속으로 외치며 다시 잠에 들었습니다.
이번 주가 좀 빡세긴 했어요. 월요일과 화요일은 아내가 야근을 해서 저녁 육아 독점을 해야 했고요, 수요일은 아이 생일날이라 새벽부터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저녁엔 생일 밥상과 축하 파티를 하느라 무리를 했거든요. 아내도 저도, 월 화 수 연속으로 풀 야근을 한 셈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 겁니다. 아이와 등원 준비가 유독 힘들게 느껴졌던 건요.
아침 등원 준비 과정에서 아내와 아이 간의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얼른 옷 입자~","양치해야지~"는 말에 아이가 짜증을 내고 있었고, 아내도 왠지 모르게 예민합니다. 아내도 연이은 야근이 힘들어서 더 그랬을 겁니다. 두 사람의 말씨름을 보고 있자니, 저도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습니다. 한숨이 나왔죠. "나 먼저 출근할까?"라고 묻는 아내에게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더군요.
그래도 어찌어찌 아이를 셔틀버스에 태워 보냈고, 회사에 도착해 아내와 메시지를 주고 받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준비를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오늘 아침 우리 부부의 메시지 주제였습니다. '그래도 전보단 나아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필두로, '부모인 우리가 참을성을 가져야 할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너무 추상적인 결론이어서였을까요, 아니면 바빠서였을까요. 아내는 그렇게 해보자고 짧은 답을 하고 대화가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점심에 팀원들과 식사를 하다가, 육아에 관한 얘기가 나왔네요. 문득 궁금한 게 생겨서, 초등학교 자녀를 둔 팀원분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아침 일과도 연관이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몇 살부터 샤워 혼자 했어요? 저는 애랑 같이 씻으러 들어가서, 애한테 스스로 하라고 유도를 하는데, 샤워할 생각은 안 하고 자꾸 장난만 쳐요. 게다가 저도 벗은 상태에서 옆에서 기다려줘야 하니까 너무 추워요!"
"저희 집 애들은 대여섯 살 때부터 혼자 씻었어요."
"네에에에??? 잘못 기억하시는 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일이 빠른 7살(만 6살) 아이인데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비누칠이나 물로 헹구는 걸 너무 대충해서 결국엔 제가 마무리를 다 해줘야만 하거든요. 그런데 대여섯 살 때 이미 혼자 씻기 시작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죠. 저보다 어린 자녀를 둔 다른 분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어요. 믿기 어렵다는 입장이었죠. 초등학교 자녀를 둔 팀원 분은 한쪽으로 피식 웃으며, '믿든지 말든지' 하는 눈치로 식사를 이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네요. 오늘도 아내는 야근이라, 제가 아이 하원을 하고 함께 집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씻기는 싫다는 아이의 말에, 토마스와 친구들 DVD 에피소드 한편을 때린 후 샤워하기로 아이와 약속을 해봅니다.
그런데 DVD 한편이 끝났는데도, 아이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네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배가 고프니 밥부터 먹어야겠다며 말을 바꿔서 제 부아를 돋게 만듭니다. 그래도 말로 잘 타일러 봅니다.
"이제 7살이니까 샤워도 스스로 해야 하는 거야. 아빠 팀 사람 아이들은 대여섯 살 때부터 혼자 씻었대!"
이 말이 동기부여가 되었는지, 아이가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오네요. 그리곤 의외의 말을 합니다.
"오늘 나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씻어볼게! 아빤 나가!!"
'오...?'
"물만 틀어주고 아빤 나가! 그동안 아빤 식사 준비해 줘!"
제가 옆에 있어 주려고 했으나, 아이는 극구 아빠는 나가라고 합니다. 왠지 불안하면서도 화장실 문을 닫고 나가봅니다. 과연 아이가 혼자 잘 씻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윽고 아이가 씻는 소리가 들립니다.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번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아이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하게 혼자 식사 준비를 하니 이렇게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냉동실에서 꺼낸 갈비탕을 냄비에 넣고 끓이는 한편, 프라이팬을 꺼내 계란 프라이를 준비해 봅니다. 이 프라이팬은 아내가 사은품이 풍성하다며 홈쇼핑에서 구입한 프라이팬 세트 중 하나입니다. 코팅 프라이팬임에도 불구하고, 두부와 계란 프라이를 할 때마다 프라이팬이 눌어붙어 요리에 어려움이 있는 프라이팬입니다.
오늘 같은 고요함 속이라면, 낮은 열로 서서히 달구어 예열하여, 달걀 프라이를 프라이팬에 눌어붙지 않게 요령을 부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오릅니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따르고, 한 바퀴 휘 돌려봅니다. 낮은 열에서 한참을 달군 후 계란을 탁 깨트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 중간열로 올려봅니다. 오? 계란 프라이가 프라이팬에 눌어붙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신기술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희열을 느끼고 있는 데, 아이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가 들립니다. 설거지를 잠시 멈추고, 화장실에 가보니 아이가 샤워를 마치고, 물기마저 다 닦은 상태에서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있네요?
'어??? 이렇게 샤워를 쉽게 한다고???'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심지어 머리의 물기도 수건으로 깔끔히 닦아낸 모습이었습니다. 의심이 갔습니다. 머리를 다시 헹궈주겠다고 아이에게 말해봅니다. 그러자 아이가 빽 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을 냅니다. 이미 다 하고 로션까지 발랐는데, 다시 머리를 감으라고 한다고 화를 냅니다.
근데 이해는 갑니다. 제가 아이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이대로 끝낼 것인가, 다시 씻길 것인가.
이내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오늘은 이대로 끝내는 걸로. 아이가 샴푸 거품이 남은 상태에서, 헹구는 걸 멈췄을지도 모릅니다. 거품은 수건에 닦여서 지금 보이지 않는 걸지도 모릅니다. 샤워타월이 등 근처엔 가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눈 감아보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은 아이 스스로 샤워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홀로 마친 날이니까요. 샴푸 한번 덜 헹궜다고 머리가 빠지거나 두피 트러블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내일은 마무리할 때 제가 조금 도와줘서 깨끗이 헹구면 됩니다. 중요한 건 오늘 아이가 스스로 샤워를 해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아이가 아직 어려서' 못할 걸로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시켜보니 '해냈습니다.'
그럼 그동안 못한 건, 아이 탓이 아니라, 믿고 기다려주지 못한 제 탓이었던 겁니다. 그래놓고, 회사 사람들에게 "대여섯 살이 혼자 씻는 건 말도 안 된다"라고 말했던 겁니다.
아이에게 대견함과 동시에,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몰려들었습니다. 아내에게 말로만 "우리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주자"라고 하고도, 저는 막상 다른 행동을 하려고 하고 있었네요.
아이는 우리 생각보다 더 홀로 잘할 수 있었어요. 부모인 우리의 성급함과, 조바심이 그걸 방해한 것뿐이었어요.
이렇게 오늘도 또 하나를 배웠습니다. 다음번 아침 등원 준비는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최대한 기다려줘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