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사수가 '누나'라서 다행이었다.

늦은 출발을 두려워하던 나에게, 가장 확실한 용기를 심어준 사람

by 에세이 작가 훈

스물아홉. 남들은 대리를 달거나 이직을 준비하는 나이였다. 남자 치고도 꽤 늦은 시기에 첫 직장에 발을 들여놓게 된 나는 매일 아침이 두려웠다. ‘남자니까 더 잘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충고와‘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자격지심. 그 사이에서 출근길 내 손은 늘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내가 배정받은 부서는 회사 내에서도 업무 강도가 높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무실 풍경은 기이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한 여자 선배 한 명, 그리고 이제 막 책상을 배정받아 엉거주춤 서 있는 덩치 큰 나. 그 넓은 공간에 단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치 고립된 섬 같았다.


직속 상사이자 유일한 사수였던 그녀는 ‘철인’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 인력난으로 인해 휴일조차 반납하며 두 사람 몫의 일을 홀로 감당해 왔기 때문이다. 업무의 기초조차 모르는 신입을 데리고 당장 성과를 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부담을 주지 않았다. 사무실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누구일지 겁부터 나 굳어버리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면서도 하던 일을 멈췄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겁먹은 남동생을 달래는 누나처럼, 때로는 엄격한 선생님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업무의 이치를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내 직장 생활의 첫 번째 구원자였다.


사내에서도 독보적인 업무 장악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입사 3개월 만에 수습 기간을 끝내자마자 능력을 인정받아 대리 직급을 달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빠른 속도감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업무의 원리를 깨우치고 제 몫을 해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효율성보다 사람의 성장을 먼저 생각하는 강인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 팀의 인원이 보강되고 그녀 역시 승진을 거듭하며 관리자의 위치로 올라갔다. 그래도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헤매던 시절의 나를 잊지 않았다.(그녀는) 단순한 보조 업무에 머무르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회를 주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팀의 주축으로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녀는 나를 어엿한 실무자로 단단히 키워냈다.


세심한 배려와 혹독한 트레이닝 덕분이었을까? 통상적으로 2년 이상이 걸렸던 대리 승진을 입사 1년 6개월 만에 이뤄냈다. 그리고 기준보다 높은 연봉을 받았다. 알고 보니 그녀가 이를 위해 인사팀과 수차례 면담을 하며 싸웠다는 사실이었다.


”이 친구는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


동기도 없는 외로운 싸움에서 그녀가 나를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방패가 되어주었는지 뒤늦게 깨닫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위기도 있었다. 회사의 사정이 급격히 어려워져 차가운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어제까지 형, 누나 하며 지냈던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짐을 싸서 떠나는 참담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는 그동안 쌓아 올린 성과 덕분에 감원 대상에서는 제외되었지만 홀로 남겨졌다는 미안함이 나를 짓눌렀다. 차라리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마음을 눈치채고 나를 불러냈다. 퇴근 후 술잔을 기울이며 그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람들이 떠나서 마음 힘든 거 알아. 하지만 너는 나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은 끝까지 같이 가고 싶어.”


그 말 한마디가 흔들리는 내 멘털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사실 이미 충분히 경력을 쌓은 뒤라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불안한 회사에 남아 그녀와 함께하는 가시밭길을 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벼랑 끝에 몰린 순간마다 “누나 믿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라며 나를 설득해 주던 그녀의 끈끈한 의리. 그것을 차마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물아홉의 늦은 나이에 아무것도 모른 채 사회에 던져진 나. 그녀는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부족함을 채워주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 차가운 명령보다는 따뜻한 믿음이 사람을 얼마나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녀는 단순한 직장 상사를 넘어 내 인생의 방향키를 잡아준 진정한 은인이자 스승이다.


단둘이 야근 후 마시던 소주, 드립커피를 나눠 마시며 나누었던 그 치열하고도 따뜻했던 시간들, 그 기억이 내 몸에 나이테처럼 새겨졌다. 이제는 나 또한 누군가의 서툰 실수를 감싸 안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녀가 베풀었던 ‘기다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선배가 되기 위해서다.


나의 부족함이 들통날까 전전긍긍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불안한 청춘의 시절. 내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비바람을 막아주었던 그녀의 넓은 아량 덕분에, 비로소 어른의 몫을 해내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