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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21. 2023

망각의 열매가 필요한 미니에게

¼ 쯤 제정신이 아닌 안나가


 망각의 열매가 필요한 미니에게

 

 

 안녕 미니. 나는 오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미니의 편지를 읽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제 막 토요일을 시작한 나는, 나보다 13시간 앞서 토요일을 보내고 있는 미니의 편지가 흥미롭습니다. 마치 미래에서 온 편지를 받아보는 것 같거든요. 비록 13시간 앞선 미래이긴 하지만 미래는 미래잖아요? 미국에도 로또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미니가 먼저 로또 1등 당첨 번호를 보고 편지에 적어주면, 나는 그 번호로 로또를 사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네요. 앞뒤가 하나도 안 맞지만, 나는 이런 류의 엉뚱한 상상이 가라앉은 마음과 기분을 환기시켜 준다고 믿어요.(+ 과도한 상상은 정신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라고 농담 삼아 적어보려고 했는데, 흠 글쎄요? 해로우려나요? 동의할 수 없네요.)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 상상하고, 그 상상의 결과물인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지루한 일상의 ‘활력’으로, 자의/타의로 억압된 욕망의 ‘발현’과 ‘충족’으로, 순수한 ‘기쁨’과 ‘환희’ 혹은 부재의 ‘결핍’등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그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려 하고 있고요. 나 원 참. 다시 생각해 봐도 미니의 말이 백 번 맞아요. 그때의 나는 정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글을 쓰겠다고 한 게 맞습니다. 내가 벌인 판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무지한 내가 뱉은 선언의 무게가 버겁고 꽤 막막하네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베어 봐야죠.

 

 내가 언젠가 미니에게 “내 글은 사회성이 떨어져요.”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수년 째 품에 끼고, 수차례의 퇴고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나의 애증의 소설. 상냥한 나의 주변인들이 지금껏 기다려주고 있는 소설, ‘매직 인 소그노’를 두고 한 말입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애증의 소설을 완성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만, 나는 도무지 이 소설을 마무리 지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0주 차에 들어선 시나리오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미니와 편지를 주고받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내 소설의 결핍요소를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나눔과 공감’입니다. 깜깜한 망망대해에서 희미한 빛을 본 것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 유한한 나의 신체가 인내심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그 빛을 향해 나아가야 줘야 하는 실행 단계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아주 느리지만 나는 이렇게 또 나아가고 있어요.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온몸에 힘을 풀고 인생의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해요. 흘러가다 보면 언젠가 답이 떠오르거든요. TMI이지만, 내가 영감을 만나는 방법도 비슷합니다. 글을 쓰다 잘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거나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을 때, 나는 그냥 혼자 끙끙 앓아요. (혹시 기회가 생기면) 친구와 고민되는 부분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답은 찾을 수 없죠. 하지만 며칠 동안 그 고민을 깊이 품고 지내다 보면,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아, 그 부분은 그렇게 해야겠다.’ 혹은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 이렇게요. 대부분의 내 고민은 이런 식으로 싱겁게 끝납니다. 신의 계시를 받거나 번개를 맞듯이 오는 영감은……. 어떤 기분이려나요. 나에게도 언젠간 그런 영감이 오겠죠. 그러고 보니 악착같이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네요.

 

 ‘장편소설을 다 쓰고 난 작가는 대부분 흥분 상태로 뇌가 달아올라 반쯤 제정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정신인 사람은 장편소설 같은 건 일단 쓸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습니다. 물론 지금의 저는 장편소설을 쓸 수 있는 깜냥도 없습니다만, 언젠간 꼭 쓰고 싶은 걸 보면 ¼ 쯤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미니가 말한 대로, 나이를 먹는 것이 가전제품의 배터리처럼 에너지 수용력이 점점 줄어드는 것과 같다면, 조금 더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겠네요.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아니 처음부터 주어진 시간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몰라요.

 

 미니가 활력을 잃고 무기력한 모습이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럽습니다 (그 무기력함이 어디까지 미니를 끌고 내려갈 수 있는지 들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미니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것을 느낍니다. 누구나 아는 그 감정 상태,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공유하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를 가진 것이 아니고서야,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미니가 꾸밈없이 솔직할 때, 미니가 열심히 찾고 있는 그 쓸모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 너무 많은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거나 바꾸려 하지 말도록 해요. 마음이 소란스럽고 기분이 가라앉아 허무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허공에 손을 뻗어 망각의 열매를 하나 따 먹는 겁니다. 그리고 뻔뻔하게 망각 망각하자고요. 나는 우리에게 망각 망각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미니가 혼자 깊은 정글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다만 미니가 미니답게 난리 부르스 떨 수 있는 작은 텃밭은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오늘 도 편안한 밤 보내요. 그리고 곧 맞이할 일요일은 조금 더 신나 있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럼 이만!

 

 

 ¼ 쯤 제정신이 아닌 안나가

 







Photo l © 안나와 미니 

2023년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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