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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27. 2024

매직 인 소그노 #2

#2



기다릴게. 우리 거기서 만나. 가라앉으면 돼. 아주 깊고 낮게.


그를 만나야 해. 그는 지금 거기에 있어. 까만 밤이 없는 떠다니는 하얀 방. 그곳으로 가야 해. 나를 그곳으로 보내줘. 그가 언제 사라질지 몰라. 어서 가야 해 더 늦기 전에. 그의 연주가 끝나기 전에 나는, 그곳으로 가야만 해.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거든. 분명해.


가라앉아야 한다고 했어. 잠긴 뒤에도 한참을 더 내려가야 한다고 했어. 내 몸의 모든 구멍이 포근한 어둠으로 가득 메워지고도 한참 더. 그렇게 한참을 가라앉다 보면 어느새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는 그곳의 찐득찐득한 무게를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어.


나는 확신했어. 그곳이 바로 12살의 어린 엄마가 빛을 찾아 헤맸던 곳과 결이 같은 곳이라는 것을. 집에서 키우던 소가 죽었다고 했어. 길게 축 늘어진 보라색 혀를 보고 그만, 엄마의 심장이 멈춰 버렸다고 했어. 어린 딸을 먼저 보낼 수 없었던 할머니는 엄마의 시신을 7일간 방에 두었고 믿을 수 없게도 엄마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고 했어. 기적처럼. 


어느 안온한 저녁. 엄마는 내일 아침 반찬거리를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어. 그리고 말했지.


그 7일간의 기억이 있어.


깜깜한 어둠 속에서 12살의 엄마는 빛을 찾아 헤맸다고 했어. 이유는 모른다고 했어. 그냥 빛을 찾는 것이 엄마의 존재 이유처럼 느껴졌다고 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보다 더 소름 끼쳤던 건,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둠의 무게였는데 마치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어. 영겁의 무게가 엄마의 그 작은 몸에 찰싹 엉겨 붙어 옴짝달싹 못 하도록 조여왔다고 했어.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고통스러웠다고 했어. 숨을 쉴 때마다 그 무게가 폐 속으로 차올랐다고도 했어. 물처럼 말이야. 엄마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그 7일이 억만년 같았다고도 했어.


그날 밤 나는 생각했어. 그때 엄마한테 엉겨 붙었던 어둠이 어디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가 내가 피투성이로 태어나던 날, 그러니까 내가 엄마의 질을 타고 쑤욱- 미끄러져 이 세계로 나오던 바로 그날, 나한테 묻어 나왔구나. 


내가 오직 나일 수 있게 하는 이 고유함!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보이고 들리게 하는 이 초월함!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에도 언제나 가슴 한편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이 고독함! 오, 어둠! 그게 바로 너였구나. 나는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푼 것처럼 조금 편안해졌어.


그리고 그를 만났어. 그는 아주 중요한 연주를 앞두고 있었어. 가라앉아야 한다고 했어 아주 깊고 낮게. 기다리겠다고도 했어 언제까지나. 어쩌면 그가 가라앉아 있는 까만 밤이 없는 떠다니는 하얀 방은, 12살의 엄마가 7일간 빛을 찾아 헤맸던 그곳을 지나 조금 더 아래로 가라앉아야 닿을 수 있는 곳일지도 몰라. 하얀 방은 마치 새하얀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섬 같다고 했어. 명심해, 그곳엔 해도 달도 땅도 바람도 바다도 없어. 오직 까만 밤이 없는 하얀 방만이 허공에서 이따금 출렁거릴 뿐이란 걸. 이라고도 말했지.  


나는 아직도 그곳을 찾아 헤매고 있어. 차라리 몰랐다면 그게 무슨 이상한 말이야 하고 웃어넘길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까. 하지만 나는 아주 분명히 알고 또 느끼고 있어. 그곳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곳을 처음부터 그리워해 왔다는 것을. 밝히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어 그곳의 실존을.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Photo l ©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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