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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남자는 지구 반대편에서 전화 한 통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간단, 명료했다. 남자의 이별 통보엔 이렇다 할 이유도 납득할 만한 상황도 구차한 변명도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어쩌면 남자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여자가 무의식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던 그런 충동적이고 투명한 이별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여자는 남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다신 남자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이 여자를 할퀴고 지나갔다.
여자는 태연한 척 수화기 너머 남자를 설득했다. 여자의 말이 다 끝날 때까지 듣고 있던 남자는 말 없이 전화를 끊었고 끝내 여자를 보러 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시즌 어렵게 구한 남자의 한국행 비행기표와 어렵게 예약한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아파트 그리고 어렵게 꿰맞춘 휴가 일정까지. 남자를 위해 여자가 어렵게, 준비한 일들이 고작 전화 한 통에 모두 쉽게, 의미를 잃었다.
여자는 떨어뜨리듯 수화기를 내려놓고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양손을 마주 잡는 여자. 바싹 마른 눈동자와 입술. 불규칙한 들숨과 날숨. 머릿속을 쾅쾅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 여자의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라디오에서 슈베르트의 <야상곡>이 흘러나왔다. 한 입 베어 문 캐러멜의 실꼬리처럼 길게 늘어나는 첼로와 바이올린 선율 위를 무심하게 수놓는 아름다운 피아노 음들. 여자의 마음이 미어졌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여자를 마구 때렸다. 받지 말걸. 남자의 전화를 받은 스스로가 죽도록 밉고 원망스러웠다. 여자는 흐느껴 울다가 몸부림치며 목 놓아 울었다. 10분 남짓한 슈베르트의 <야상곡>이 끝나갈 때까지도 여자의 울부짖음은 계속됐다.
맞은편 선반 위 액자가 여자의 눈에 띄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남자와 여자. 남자의 공연을 위해 만사를 제쳐 두고 떠났던 여름휴가. 이탈리아 북서부 해안가의 작은 마을. 고대의 요정들이 모여 살았다는 신비로운 보랏빛 땅. 남자와 여자가 함께 고독하고 환희하며 마음껏 서로 사랑했던 곳, 소그노. 여자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 밖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방울과 그 틈을 둥글게 메우는 창문 안 슈베르트의 <야상곡> 사이, 여자는 그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여자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기척도 없이 무례하게 여자의 마음 한가운데에 뚝 떨어진 이별에 갈기갈기 찢기지 않기 위해, 여자는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구조대를 기다리는 생존자처럼 견디고 또 견뎠다.
가혹한 밤이었다.
Photo l ©Mujer y clave © Francisco Ramírez Afinador de Pian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