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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27. 2024

매직 인 소그노 *5

*5




“정말 괜찮아?”


A가 날개를 활짝 편 나비처럼, 뚜껑을 활짝 연 피아노 앞에 앉아 물었다. 그런 A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a. 

“밖에 나가서 구경하고 와도 돼. 축제잖아.” A가 눈을 피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여기 있는 게 더 좋아.” a가 몸을 웅크리며 대답했다.

“듣고 싶은 곡 있어?” a의 손을 당겨 무릎 위에 앉히며 묻는 A. 

“음, 슈만?”

“지금은 안돼.”


단호하게 거절하는 A와 어리둥절한 a. 이내 A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a의 입술을 쓸며 말했다.


“알잖아. 슈만은 언제나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거.”

멈칫한 a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태연하게 a의 손등을 쓰다듬는 A.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


a가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곡명을 외쳤다. 의외인걸. 하는 A에게 나 당신이 그 곡 칠 때 당신 표정이 정말 좋아. 하는 a. A의 호박색 눈동자에 풋풋한 설렘이 서렸다. a가 A의 무릎에서 내려와 피아노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A는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르게 앉았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두 손을 피아노 건반 위에 올리는 A. A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a가 둘셋, 하고 박자를 맞춰 주었고 A는 연주를 시작했다.


건반을 하나둘 눌러가며 천천히 손가락에 힘을 실어 가는 A. A는 원하는 소리가 나지 않는지 곡의 도입부를 치고 또 쳤다. 같은 부분을 계속 연주하며 마음에 드는 소리를 조금씩 늘려가는 A. A의 호박색 눈동자가 초점 없이 불투명해졌다. 점점 앞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앙다문 아랫입술과 턱. 점점 더 둥글게 말리는 A의 등과 어깨 그리고 딱 그만큼 더 또렷해지는 음들.


어디선가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다양한 악기 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A의 피아노 음 사이사이를 메웠다. 피아노 방은 어느새 a가 수십 번 돌려봤던, A와 런던 오케스트라의 협연 영상 속 화려한 공연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명화가 그려진 아치형 천장 아래, 무대 안쪽 벽면의 오르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란 조명과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 옆의 A와 피아노를 둘러싸고 반원으로 모여 앉은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그들을 닮은 윤이 나는 악기들. 그리고 어두운 객석에서 숨죽이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까지. a는 침착하게 떠다니는 음표들을 밟고 공중으로 튀어 올라 그들 위를 자유롭게 헤엄치고 다녔다. 존재들을 끌어당기고 또 밀어내는 신묘한 곡. 피아노 방의 만물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곡이 절정으로 치닫던 그 순간, 밖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문 뒤에서 들려오는 가는 목소리.


“브라보!”


A가 잠에서 깨듯 연주를 멈췄다. 동시에 모든 것이 피아노 뚜껑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팽팽한 정적이 흐르는 피아노 방.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A와 a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브라보!”


또다시 문 뒤에서 들려오는 맑고 높은 목소리. A가 a만 아는 표정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브라보!”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배시시 웃는 꼬마. 꼬마와 눈이 마주친 A가 꼬마처럼 배시시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꼬마는 문턱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던 엄마의 품에서 나와 아빠의 다리를 잡고 기대섰다. 엄마의 옅은 헤이즐넛 색 눈동자에 아빠의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를 물려받은, 성별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작고 사랑스러운 꼬마. 꼬마는 손뼉을 치며 계속 브라보! 브라보! 인사하듯 외쳤다.


꼬마의 아빠가 멋쩍게 웃으며 빠르동(Pardon-미안해요.)하자, A가 세 빠 그하브(C'est pas grave-괜찮아요.)했다. 뜻밖의 매끄러운 대답에 a의 눈이 살짝 커졌다. 꼬마의 아빠와 유창한 프랑스어로 대화를 이어가는 A. a는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의식적으로 꾹 다물었다. 


A가 문을 활짝 열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a와 꼬마를 번갈아 바라본 뒤 다시 연주를 시작하는 A. A의 손끝에서 쇼팽의 <에튀드 Op.10> 1번이 굴러 나왔다. 경쾌하게 오르락내리락 쏟아지는 음들. 꼬마는 어김없이 곡 중간중간 브라보! 하며 손뼉을 쳤다. 쏟아진 음들이 피아노 방 안팎으로 튀어 오르며 모두를 잇고 엮었다. a의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꼬마의 가족이 떠나고, 피아노에 기대앉으며 나른한 얼굴로 a를 지그시 바라보는 A. a가 A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A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a의 손가락에 감겼다. 


“당신과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시 같아.”

“그래? 난 악보 위를 걷는 것 같은데.”

“나 지금 행복해.”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A가 몸에 힘을 풀고 a에게 온전히 기대어 안겼다. a의 심장 박동이 A의 귓바퀴를 타고 머릿속을 두세 바퀴 돈 뒤 A의 심장에 닿아 부서졌다. A는 눈을 감았고, a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당신 프랑스어도 할 줄 알아?”

A의 얼굴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며 a가 물었다.

“응, 어쩌다 보니.”

한껏 기지개를 켜며 대답하는 A. a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A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으며 건반 위에 사뿐히 손을 올렸다. 한 번도 연주를 멈춘 적 없는 것처럼 당연하게 다시 시작된 A의 연주. 잠시 넋을 놓고 있던 a가 꿈꾸듯 중얼거렸다.


“당신도 이곳도 정말, 마법 같다.”







Photo l ©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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