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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27. 2024

매직 인 소그노 •2

•2



오래전 캘린더에 저장해 놓은 남자의 홍콩 공연 알림이 휴대전화에 떴을 때, 여자는 벼락에 맞은 것 같았다. 홍콩의 밤거리를 거닐다 다다른 공연장 앞에서 “꼭 와줘야 해.”하던 남자에게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던 여자.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을 통보하기 훨씬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공연이었다. 


이 사랑은 결말이 필요해.


허겁지겁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아니 쑤셔 넣은 이 사랑은 여자의 마음속을 굴러다니며 끊임없이 생채기를 냈다. 여자 스스로 꺼내 직면해야 한다고, 이건 오롯이 여자의 몫이라고, 계속 이렇게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어디선가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여자에게 시그널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꽉 찬 퇴근길 버스 안에서 홍콩행 비행기 티켓을 단숨에 결제했다. 홍콩에 간다는 여자에게 사람들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오직 여자의 오랜 친구 H만이 싱겁게 “그래.” 했다. “끝내려고 가는 거야.” 여자가 변명하듯 덧붙여 말하자, H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그래.” 하고 커피를 홀짝였다. H의 시원찮은 반응에 여자는 오랜만에 크게 소리내 웃었고, H도 웃음을 터트렸다.


공연 전날 밤. 남자와 함께 묵었던 같은 호텔 방 같은 침대 위에 홀로 누운 여자. 방 안을 가득 메운 고요함이 여자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몸을 뒤척였다. 여자의 몸을 감는 바스락거리는 침구 소리. 몸을 일으킨 여자가 암막 커튼을 신경질적으로 걷었다. 새벽 2시. 무심하게 반짝이는 홍콩의 밤. 저 멀리 작게 공연장의 지붕이 보였다. 여자는 낮에 챙겨 온 공연 팸플릿을 펼쳤다.


1부 - 프레데리크 쇼팽 <24개의 전주곡>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서린 곡. 여자의 마음이 어지러웠다. 내일이면 다 끝날 이 사랑. 여자를 지독하게 괴롭혀왔던 외로움과 그리움, 기다림도 모두 함께 사라지겠지. 여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공연장에 일찍 도착한 여자는 곧장 남자의 대기실을 찾아갔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익숙한 피아노 소리. 남자다. 여자의 온몸이 쿵쾅거렸다. 여자는 도망치듯 로비로 뛰쳐나왔다. 도무지 아무것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가야 할까. 


여자는 로비 한편의 구석진 의자에 앉아 한참을 망설였다. 공연 시간 30분 전. 로비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여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렸다. 공연장 안내원이 여자에게 다가왔다.


“지금 들어가지 않으시면 1부 종료 후, 휴식 시간에만 재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마치 여자의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다독이듯 말하는 안내원. 여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마워요.” 여자의 대답에 안내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입장하자 콘서트홀의 모든 문이 닫혔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핀 조명이 무대 위 피아노를 비췄다. 무대 하수 쪽 음향 반사판의 문이 열리자, 거짓말처럼 남자가 피아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자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날개를 활짝 편 나비처럼, 뚜껑을 활짝 연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 남자.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등을 굽히고 앉은 남자는 손을 늘어트리고 죽은 듯이 침묵했다. 이내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남자. 남자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여자가 둘셋, 하고 마음속으로 박자를 맞춰주었고 동시에 남자가 연주를 시작했다.


전주곡 1번의 음들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익숙한 음들이 여자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이어진 전주곡 2번은 여자를 사정없이 밟기 시작했다. 아물지 않은 여자의 마음이 터져 흘렀다. 이내 풍성하게 쏟아지는 전주곡 3번의 음들. 여자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벅차올랐다. 찡그렸던 눈썹을 활짝 펴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 여자. 남자는 여자에게 연주해 주던 것처럼 전주곡 3번의 마지막 화음을 아주 부드럽게 굴려 치고, 전주곡 4번을 바로 이어서 쳤다. 마치 한 곡을 연주하는 듯이.


짓궂어.


여자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묻지 못한 수많은 질문이 여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쩌면, 하는 헛된 희망이 여자의 가슴에 피어올랐다.


꿈 깨.


여자의 ‘동물적인 직감’이 속삭였다. 거의 동시에 시작된 전주곡 5번. 어딘지 모르게 낯설어진 남자의 음악. 여자의 얼굴에 불안이 드리워졌다. 이어지는 6번과 7번에 온 정신을 집중해 보는 여자. 몰아치는 전주곡 8번을 들으면서 여자는 절망했다.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


여자가 감히 뒤따라갈 엄두도 못 낼 만큼 저 멀리 더 깊고 낮게 가라앉은 남자와 남자의 음악. 연주가 계속될수록 무대 위 남자는 더욱더 낯설어졌다. 사랑이 가득 서려 있던 남자의 두 눈도, 이따금 여자를 달아오르게 했던 입술도, 여자를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던 두 손까지도. 여자가 알던 남자는 이제 없었다. 고유한 남자의 음악이 날카롭게 여자를 위협했다. 여자는 ‘그곳’에서 남자를 만나기 위해 별 볼 일 없는 문장들을 끄적거리며 발버둥 치던 날들이 떠올랐다. 여자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여자의 고질적인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여자를 손가락질했다.


마침내 여자는 남자와 남자의 음악을 놓아주지 않은 것은 바로 여자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남자와 남자의 음악을 훌훌 털어버리고 홀로 설 수 없는 초라한 자신이 가련했다.


남자가 전주곡 12번을 막 마쳤을 때, 여자는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여자는 타협했다. 아직은 이 사랑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허무하게 남자와 위대한 남자의 음악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평범한 여자는 비범한 남자를 여전히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Photo l ©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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