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P!”
봄꽃이 만발한 정원 한가운데서 a가 소리쳤다.
“여름에 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P가 선글라스를 벗고 소년 같은 얼굴로 걸어왔다. 햇빛에 반사된 매혹적인 녹색 눈동자가 a를 훑고 지나갔다. 두서없이 와락, a를 끌어안는 P. 달콤한 향이 섞인 담배 냄새가 a의 몸을 감았다.
“못 기다리겠어서 먼저 왔어요. M은 예정대로 올 거예요. 잘 지냈죠?”
“네, 두 분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어요.”
a가 간신히 P를 밀어내며 대답했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다시 a를 꽉 끌어안는 P. 품에 안긴 a가 버둥거리자, P는 피식 웃으며 a를 놓아주었다. 두 사람은 새로 내린 향긋한 커피를 들고 정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달라 보여요, a. 좋은 쪽으로.”
“P는 여전히 잘 생겼네요.”
“한창이니까요.”
“말 잘하는 것도 여전하구요.”
“칭찬 고마워요.”
P의 넉살에 웃음이 터진 a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키득거렸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때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버려서 미안해요.” a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난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P가 담배를 꺼내며 선택적으로 대답했다. P의 배려를 느낀 a가 희미하게 웃었다. P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멀리 뿜어내고 물었다.
“글 쓰는 건 어때요?”
“거의 다 썼어요.”
“정말요? 나도 읽어 볼래요.”
“한글이에요. 번역본 완성되면 꼭 보낼게요.”
“번역본까지 만들어 주는 거예요? 이거 영광인데.”
“제가 원래 사려 깊은 편이죠.”
P의 능청스러움을 더 능청스럽게 맞받아치는 a. P가 제법이라는 듯 a를 향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a가 낮게 콜록거리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어깨를 으쓱하는 P와 보란 듯이 더 크게 기침하는 a. P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더 바빠지겠어요. 슬슬 축제 준비 시작하는 거죠?”
“네. 올해 축제도 보고 갈 거죠?”
“아뇨, 이제 돌아가야죠. 할 일이 있어요.”
P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까딱하자, a가 부러 근엄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복수를 좀 해야 해서.”
“오, 그거 내가 아주 좋아하는 건데.”
맞장구를 쳐주는 P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살살 끄덕이는 a. 맞물린 a의 입술이 장난스럽게 꼼지락거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P가 진지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그런데 a의 복수는 어쩐지 우아할 것 같아요. 해롭지 않을 거 같달까.”
속이 훤히 다 드러난 얼굴로 멈칫하는 a. P가 부러 순진한 얼굴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P 답네, 정말. 긴 겨울을 견딘 꽃망울이 터지듯 a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노력해 볼게요. 많이 해롭지 않도록. 소중한 사람한테 하는 거니까.”
“응원할게요. 계속 소식 전해줄 거죠?”
“그럼요.”
a가 고개를 돌려 봄 바다의 영롱한 윤슬을 바라봤다. P는 검은 생머리에 반쯤 가려진 a의 옆모습을 눈으로 훑으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커피잔의 주둥이를 검지 손가락 끝으로 빙글 돌리며, 잦아드는 김을 바라보는 a.
“부탁이 하나 있어요.”
a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P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키스해 주면 들어 줄게요.”
굳은살이 박인 굵은 손가락으로 경계가 또렷한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는 P. a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노려보자, P가 키득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장난이에요. 너무 자주 진지하면 건강에 안 좋아요. a.”
a가 자기도 모르게 높게 솟아 있던 어깨를 내리며 피식 웃었다.
“부탁이 뭔 데요?”
“계단 아래에 있는 두 개의 문에 관한 거예요.”
P의 물음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하는 a. 어쩐지 a의 부탁을 이미 아는 듯한 P의 얼굴을 보고 잠시 망설이던 a가 입을 열었다.
“혹시, 왼쪽 문을 열어줄 수 있어요?”
“불가능해요.”
a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같이 대답하는 P. a가 의아한 눈초리로 P를 바라보았다.
이내 P가 중요한 협상 테이블에 나온 외교관 같은 얼굴로 a에게 볼을 들이댔다. P의 행동의 의미를 알아챈 a가 한숨을 쉬며 의자 뒤로 기대앉았다. 협상의 주도권을 쥔 P도 잃을 것이 없다는 듯 의자 뒤로 깊숙이 기대앉았다.
팔짱을 낀 a와 다리를 꼬고 앉은 P.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치열한 교섭의 눈빛이 오고 갔다. 요리조리 눈을 굴리던 a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마땅한 얼굴로 P의 볼에 가볍게 키스하는 a. P가 흡족하게 웃으며 미지근한 커피를 홀짝였다. 괜히 늑장을 부리며 더 안달 나게 만드는 P. 망할 프랑스 놈. a가 분한 마음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P는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P는 서너 번 담배 연기를 뻐끔거리고 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벽이에요.”
a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얼굴로 P를 바라보았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달래듯 이어 말하는 P.
“그냥 벽이라구요. 그 왼쪽 문.”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의 a를 보며 P가 피던 담배를 가루가 나도록 비벼 끄며 말했다.
“그 문 뒤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벽에 문장식을 해 놓은 거죠. 재미로.”
거짓말. 그날 왼쪽 문이 열린 걸 분명히 봤는걸.
a는 P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왼쪽 문 뒤의 존재 역시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오래전 쇼팽의 전주곡 3번과 4번이 연결되어 있던 것을 알아차렸던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a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왼쪽 문에 관해 묻지 않았다. P도 그런 a를 보며 오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상냥한 봄바람이 a를 훑고 지나갔다. 부러 묻지 않은 수많은 질문과 긴 겨울을 버텨낸 마음속 부스러기가 쓸려 나갔다.
a는 가슴 한가운데 피어난 단단하고 또렷한 무언가를 느꼈다. 더 이상 혼란스럽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고 굳건했으며, 아름다웠다.
글이 쓰고 싶었다.
“P, 괜찮다면 실례해도 될까요? 우리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a가 고요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이죠.” 영원히 길들지 않을 P의 녹색 눈동자가 보드랍게 반짝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a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P.”
담배를 새로 꺼내 입에 물며 a를 바라보는 P.
“아까 내가 복수라고 한 거 있잖아요, 그거 내가 단어를 잘못 고른 것 같아요. 내가 하려고 하는 건 복수가 아니에요.”
“그럼요?”
P가 손가락을 튕겨 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핑-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총알처럼 솟아오르는 시퍼런 불꽃.
“용서와 용기입니다.”
살짝 벌어진 P의 입술 사이로 담배가 삐끗했다. 사그라드는 라이터의 불꽃. P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아하네요.”
a가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Photo l ©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