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넌 솔리튜드 베이스(Solitude Base)야.”
어느 금요일 저녁 대학가, H가 맥주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거기에 새드니스(Sadness) 파우더 한 스푼 추가.” H의 뜬금없는 진단에 여자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레드 와인을 꿀꺽 삼켜버렸다.
“A의 베이스는 풀 조이(Full Joy)고.”
“무슨 소리야, 갑자기?”
여자가 미간을 구기며 되물었다. 개의치 않고 엄지와 검지를 튕기며 열변하는 H.
“거기에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 추가요. ‘너무’ 순수해서 가끔 악마 같은 그 느낌 알지? 왜 그 눈치 없는 그거 있잖아. 아! 그리고 이 순수함은 시럽 타입이야. 더 얄밉게.”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H를 바라봤다. 그런 여자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H.
“넌 본질적으로 기질이 고독하고 슬프고, A는 순수한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 있다고.”
“취했냐?”
기본적인 예절을 아주 중요시하는 여자였지만, 마음을 터놓는 H에게는 여과 없이 쏘아붙이기도 하는 여자이기도 했다.
“아니, 생각해 봐.”
“뭘.”
“너 잘 안 웃지?”
“응. 너랑 있으면.”
떨떠름하게 여자를 쳐다보는 H. 그런 H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여자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되물었다.
“그래서 요점은?”
“그래서 요점은? ‘그래서 요점은?’이 뭐냐. ‘그래서 요점은?’이. 너 나랑 무슨 100분 토론하냐?”
여자의 입가에 자꾸만 미소가 번졌다. 여자는 구시렁거리는 H를 향해 양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말했다.
“H님의 소중한 사견이 정말 듣고 싶어요. 부탁합니다.”
H가 눈을 굴리자, 여자는 능글맞게 양쪽 눈썹을 찡긋했다. 맥주 두 모금에 평정심을 되찾은 H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고독하고 슬퍼. 그렇다고 네가 마냥 어둡고 우울하거나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야. 동시에 넌 아주 밝고 따뜻하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몰라. 네 베이스가 ‘슬픔 한 스푼 추가한 고독’이라는 거. 뭐 그게 네 소셜 마스크나 방어기제 같은 거일 수도 있고.”
어느새 표정 없는 얼굴로 와인을 홀짝이는 여자.
“언젠가 네가 그랬었잖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가장 행복한 그 순간에도 너는 고독하고 슬프다고. 나는 그게 한 번도 이상하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한 적 없어. 행복하면서 고독할 수도 있지. 슬플 수도 있고. 꼭 결이 비슷한 감정 몇 개만 동시에 느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그냥 아, 너는 본래 고독하고 조금 슬픈 사람이구나. 생각했어.”
여자의 입술이 적갈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H가 얼룩진 여자의 입술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A는 뭐랄까. 기쁨과 환희, 정겨움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어. 악의가 전혀 없어. 깨끗하고 투명하고 가벼워.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저기 어디 윗동네 분이라 여기 아랫동네랑 코드가 약간 다른 거 같기도 하고…….”
H가 부러 점잖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줄이자, 여자가 피식 웃었다. 곧바로 눈빛을 바꾸고 덧붙여 말하는 H.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몰라. A가 얼마나 잔인하고 지독할 수 있는지.”
여자가 H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 위로 떠오르는 연약한 날것의 여자. H의 예리한 통찰력이 방심한 여자의 최후 방어선을 뚫고 들어갔다. 의도치 않게 너무 깊게 꽂아버린 말을 뽑아내느라 당황한 H가 말을 마구 쏟아냈다.
“어, 그러니까 내 말은 A한테는 모든 게 즐겁고 기쁘고 반갑고 신기하고 그래 보인다고……. 아, 그래서 그런가? 다르긴 다르더라 A의 음악. 음악에 ‘음’ 자도 모르는 내가 들어도 A가 연주하는 음악은 뭔가 달랐어. 초월적이야. 그건 인정. 그렇긴 한데…….”
H가 논점을 잃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H가 진단해 준 것처럼 고독하고 슬퍼도 장난치고 싶을 수 있는 거니까. 이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니까. 여자는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맞아. A는 모차르트처럼 깃털 같고 쇼팽처럼 투명해. 나는 브람스처럼 고독하고 베토벤처럼 고통스럽고.”
H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여자.
“그거 알아? 모차르트랑 쇼팽은 저기 위, 어떤 곳. 브람스랑 베토벤은 바로 여기, 이곳에 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목을 움츠리며 지체 없이 사과하는 H. 여자는 더 진지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냅킨을 펴고 핸드백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교차한 두 개의 선을 ‘+’ 모양으로 그리며,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는 여자. 여자가 y축 위쪽에 초월(Transcendence), 아래쪽에 현실(Reality)을 막 썼을 때 H가 냅킨을 빼앗아 구겨버리며 소리쳤다.
“아, 미안하다고! 그만해!”
H가 입을 삐죽이자, 여자가 깔깔 웃었다. 와인을 연거푸 들이키는 여자에게 곱게 눈을 흘기는 H. H의 시선이 여자의 입술 자국으로 얼룩진 빈 와인잔을 채웠다. 시도 때도 없이 여자의 눈동자에 서리는 떫은 고독. 센스가 좋은 H가 테이블 위에 함부로 놓여 있던 멘솔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H의 밝은 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보헤미안풍의 원피스 끝자락이 너풀거렸다. 불현듯 여자가 입은 흰 티셔츠에 묻은 검붉은 와인 방울이 여자의 눈에 띄었다. 얼룩이 지려나. 여자가 아득하게 중얼거렸다.
여자는 남자와 강남대로를 걸었던 그 밤을 떠올렸다. 삶과 죽음, 우주와 고독 그리고 위대한 작곡가들에 대해 두서없이 나누고 공감했던 그 밤. 남자와 여자가 아주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던, 오직 남자와 여자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떠다니던 그 밤. 여자는 그 밤에도 남자를 위해 땅바닥에 똑같은 도표를 그렸었다.
기다릴게. 우리 거기서 만나. 가라앉으면 돼. 아주 깊고 낮게.
해가 뜰 무렵 남자가 속삭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남자의 약속에도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여자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곳의 실존을 인지했다. 윤척없이 그곳에 관해 이야기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설렘과 불안이 묻어났다. 까만 밤이 없는 떠다니는 하얀 방이라. 여자는 가본 적도 없는 그곳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남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여자는 애가 탔다. 기다리고 있겠다는 남자의 약속이 여자를 다그쳤다. 고요한 새벽, 여자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 앞에 앉았다. 무작정 글을 쓰는 여자. 며칠간 쓰고 또 쓰다 보니 여자의 몸이 붕 떠올라 어딘가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침몰하는 배 안으로 시린 바닷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여자의 몸속으로 끈적하고 텁텁한 어떤 것이 밀려 들어왔다. 여자 안에 처음부터 웅크리고 있었던 결이 비슷한 어둠이 꿈틀거렸다. 안팎으로 엉겨 붙은 그것들이 여자의 모든 구멍을 가득 메웠을 때, 마침내 여자는 그곳에 다다랐다.
어쩌면 여자의 엄마가 빛을 찾아 헤맸던 그곳에서 여자는 남자를 찾아 헤맸다. 중심을 내어주고 방랑하는 여자를 나무라듯 무자비하게 옥죄는 그곳.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여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라고 생각하고, 여긴 죽음도 소멸도 없어 하고 스스로 답했다. 여자가 가까스로 내딛는 걸음마다 되돌아가지 못한 영혼들의 흔적이 치였다. 흔적들이 여자의 미련함을 비웃으며 낄낄거렸다. 그럴수록 여자의 신의는 더욱더 활활 끓어올랐다. 여자가 이를 악물었다. 보란 듯이 더 낮은 곳으로 몸을 던지는 여자. 여자의 안전이 위태로웠다. 까마득해지는 여자의 시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만신창이가 된 여자가 표면 위로 떠 올랐다. 표면 아래에서 여자의 몸이 다시 가라앉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받치고 선 어떤 소녀. 소녀는 지쳐 있었다. 여자는 습관처럼 “엄마.” 하며 몽롱한 얼굴로 눈을 떴다.
식은땀으로 다 젖어 버린 침대 시트.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얇은 빛줄기.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황급히 휴대전화를 찾아 화면을 켜는 여자. 여자가 검색창에 남자의 이름을 써넣었다. 검색 버튼을 누르자 폭죽처럼 화면에 터져 나오는 텍스트와 이미지들. 여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얼굴로 지난밤 성황리에 끝난 남자의 공연 실황 영상을 노려보았다.
Photo l ©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