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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27. 2024

매직 인 소그노 *7

*7



피아노 방 소파 위, a가 낮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일어났어?” a를 품에 안고 악보를 보고 있던 A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응, 지금 몇 시야?” a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A가 강아지 같은 얼굴로 말했다. a가 못 말린다는 얼굴로 A를 바라보며 웃었다.


“A, 내가 예전에 가족이나 친구들 심지어 당신하고 있을 때조차 고독하다고 했던 거 아니, 어쩌면 그때 가장 고독한 거 같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럼 기억하지. 그때 당신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어. 그때 당신 엄청 예뻤다?”

a는 A의 뻔뻔함에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 a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A. 이내 웃음이 잦아든 a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H는 그게 내 기질이 고독하고 슬퍼서 그런 거래.”

“기질?” 


“응,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변하지 않는, 그 사람의 바탕이나 근본에 가까운 그것. 나 사실 이 단어가 맞는지 모르겠어. 어떤 단어가 내가 지금 당신에게 말하려고 하는 그것과 가장 가까운지도 잘 모르겠어.”


“모든 사물은 우리들이 믿고 싶은 것 이상으로 이해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대부분의 사건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영역 속에서 일어난다고 릴케가 그랬어.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거 이상한 거 아니야. 그리고 나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음, 릴케?”

“응, 오스트리아 시인이야. 이건 나중에. 하려던 말 계속해 줘.”

“어, 그러니까 H가 느끼기에 내 기질은 ‘슬픔 한 스푼 추가한 고독’이래. 그래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동시에 고독하고 슬픈 거래.”

a가 A의 눈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당신 베이스는 조이(Joy) 같다고 하더라. 당신은 기쁨과 환희, 정겨움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대.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깨끗하고 투명하고. 악의도 없고……. 구름 위를 걸어, 아니 떠다니는 사람 같다나. 그래서 당신도 당신의 음악도 초월적으로 느껴진다고 했어.”

a가 H를 변호하듯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가며 말을 이어 갔다.


“H와 그 이야기를 하고 혼자 남았을 때, 문득 당신과 강남대로를 함께 걸었던 우리의 그 밤이 떠올랐어.”

몇몇 단어를 소중하게 말하는 a를 보며 A가 미소 지었다.  


“그 밤이 끝나면 당신은 떠나야만 했어. 아주 중요한 연주를 앞두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그랬잖아, 거기서 기다리겠다고. 그래서 당신이 가버린 뒤에 내가 뭘 한 줄 알아? 나는 매일 밤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글을 썼어.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가라앉아야 하냐고 묻지도 않았던 거 기억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글을 쓰는 것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거든. 내가 충분히 낮게 가라앉아서 우리가 약속한 그곳에서 당신을 만났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아. 어느 새벽, 내 몸이 붕 떠올랐던 건 똑똑히 기억나는데 말이야. 다음 날 아침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잠에서 깼었는데 그거 말고 다른 건 기억이 전부 흐릿해…….”


횡설수설하는 a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A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단짝 친구 맞네. 똑같다 둘이.”

“응?” a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당신도 맨날 당신이 느낀 거 나한테 뜬금없이 설명하잖아.”

“내가 언제!”

“당신, 그때 땅바닥에 x축이랑 y축 그려서 당신이 느끼는 작곡가들은 이렇다 저렇다 설명했던 거 기억 안 나?”

a가 맹한 얼굴로 A를 바라보았다. 그런 a를 바라보며 양 눈썹을 추켜세워 보이는 A.

“아! 그거.”

“어, 그거!”

“그걸 아직 기억해?”


벌떡 일어나 소파에 걸터앉는 a의 얼굴이 환해졌다. A도 몸을 일으켰다. 


“당연하지. 그 참신하고 흥미로운 설명을 어떻게 잊겠어? 길을 걷다 말고 갑자기 냅다 주저앉더니, 돌멩이 하나 주워서 땅바닥에 x축과 y축을 그리고는, 차례대로 y축 위에는 초월(Transcendence) 아래는 현실(Reality), x축 왼쪽에는 가벼운(light) 오른쪽에는 깊은(Deep)을 적더니만, ‘음 제가 생각하기에 쇼팽은 여기, 모차르트는 여기. 브람스는 요기고요, 베토벤은 무조건 저기예요. 슈만과 슈베르트는 여기랑 여기고요.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는 여기 어디쯤 되는 거 같아요. 아, 말러는 당연히 여기! 당신 생각은 어때요?’라고 말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어?”


“그게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야. 그거 내가 교양수업 시간에 배운 거야. 포지셔닝 맵. 나는 악보도 읽을 줄 모르고 음악에 문외한이니까 그냥 내 방식대로 내가 느낀 작곡가들을 당신하고 나누고 싶었어.”


천진난만하게 웃는 a를 보며 A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때 내가 슈만은 거기 아니고 저기라고 했다가 당신하고 싸울 뻔했잖아. 당신 표정 진짜 살벌했어. 기억하지?”

a가 무릎을 치며 숨이 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다. A가 팔짱을 풀고 a를 꼭 껴안았다.

“당신 지금 고독해?”

“응, 엄청.”

a가 A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A가 축제의 피날레 곡 <매직 인 소그노>의 멜로디를 작게 흥얼거렸다. 식상하게도 a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감는 a.

“당신이 쓴 글 얼른 읽고 싶어.” 

A가 노래하듯 불쑥 말했다. 기계적으로 감았던 눈을 뜬 a가 A를 바라보았다. A의 호박색 눈동자에 가득 찬 순결한 환희. a는 돌연 참을 수 없는 갑갑함을 느꼈다. 

“당신처럼 예쁘고 사랑스럽겠지?”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몰라. A가 얼마나 잔인하고 지독할 수 있는지. 


H가 마음에 꽂았던 예리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정하게 a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 A. a가 불편한 얼굴로 브래지어를 옷 위로 잡아끌었다. 짓눌렸던 a의 가슴이 부풀었다. 도망쳐! 친절한 그와 위대한 그의 음악으로부터. 어디선가 삐져나온 고질적인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a를 부추겼다. 주먹을 꽉 쥐는 a. a가 혀로 볼을 쓸자 달콤 쌉싸름한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나가고 싶어.”

평소와 다른 a의 목소리에 A가 건반을 누르려다 말고 뒤돌아 a를 바라보았다.

“당신 말 대로 축제잖아.” 

A와 눈이 마주치자,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덧붙여 말하는 a. a는 A의 시선을 피해 수첩과 펜을 챙겨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섰다.

“금방 올게.”


문고리를 잡은 a가 뒤돌아선 채로 말했다. A는 말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심기가 불편한 A의 음악이 a의 마음을 꼬집고 할퀴었다.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불멸의 흉터가 남는 곳. 아이러니하게도 그 흉터 위에 새로운 싹을 틔우는 곳. 자리에 멈춰 선 a는 따끔한 가슴 한가운데를 떠올렸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문고리를 돌려 여는 a. 황홀한 바깥의 빛과 바람이 피아노 방 안으로 가득 밀려 들어왔다. a가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천천히 닫히는 문 사이로 a를 뒤 따라 나오던 A의 음악이 피아노 방으로 빨려 들어갔다. 







Photo l ©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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