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자의 홍콩 공연 날로부터 몇 달 후 여자는 소포를 받았다. 꼼꼼하게 밀봉된 서류봉투 위에 나란히 적혀 있는 남자와 여자의 이름. 여자는 현관문 센서 등이 꺼진 뒤에도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여자는 샤워를 했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저녁을 거하게 차려 먹고 TV를 켰다. 풋풋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인기 드라마가 연속 방영되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방에서 밝은 빛이 비치고 여린 꽃잎이 흩날렸다. 어디선가 신성한 종소리도 울렸다. 상투적인 장면들에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숨겨 놓았던 불순한 반항심이 삐져나왔다. 여태껏 강요당한 감정의 모양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다. 나의 사랑은 그렇게 숭고하게 오지 않았다. 무지하고 순결한 내가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마음은 모조리 다 타버린 후였다. 그것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여자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일주일 후 여자는 남자가 보낸 서류봉투를 뜯었다. 입구를 아래로 향하게 뒤집어 탈탈 터는 여자. 서류봉투 안에서 책이 한 권 툭 떨어졌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위대한 시인 릴케와 혼란스러운 젊은 시인 지망생 카푸스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엮은 서간집. 3편의 편지를 읽었을 때 여자는 책을 덮었다. 사무적인 얼굴로 책을 반으로 꺾어 쥐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훑어 넘기는 여자. 여자의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넘어가는 책장에서 일어난 바람에 나풀거렸다.
당신의 고독에 대해서 더 많은 신뢰감을 지니도록 하십시오.
릴케가 책 속에 언급한 모든 ‘고독’에 빠짐없이 밑줄을 그어 놓은 남자. 여자는 도무지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얄미워.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여자가 언짢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여자의 사정에 무신경한 남자가 야속했다.
남자의 천진난만한 응원과 격려가 여자를 숨 가쁘게 했다. 악의 없이 권하는 남자의 음악은 여자를 작아지게 했고, 남자의 고유한 방향과 속도는 여자로 하여금 자신에 관한 모든 것들을 불신하게 했다. 여자가 사력을 다해 남자를 향해 한 발짝 내디디면 어김없이 여자와 남자 사이의 거리를 친절하게 상기시켜 주고는 시치미를 떼는 남자. 남자와 남자의 위대한 음악이 집요하게 여자를 옥죄었다.
갑자기 여자는 남자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호의가 티 없이 맑고 순수해서 더 화가 났고, 악의가 없어서 더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지난날 여자의 사랑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해소되지 않은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여자의 사랑이 증오로 불타올랐다.
그냥 죽여버릴까.
여자가 남자의 이름을 검색했다. 화면 가득 빽빽한 남자의 공연 일정. 여자는 수첩에 시간과 장소를 적어 내려갔다. 여자의 입가에 오싹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입을 오므려 표정을 지우는 여자. 손에 쥔 만년필의 펜촉이 날카롭게 빛났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나는 계단 구석에서 썩고 있던 그날의 생쥐를 떠올려. 난생처음 맡아보는 악취, 모래더미처럼 변해버린 절반의 몸 그리고 수선스러운 정적. 차갑게 식은 당신의 몸은 얼마나 빨리 딱딱하게 굳어 버릴까? 나는 당신의 고운 열 개의 손가락을 뿌리 끝까지 잘라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꼭꼭 숨겨 놓을 거야. 당신의 영혼이 영원히 찾지 못하도록……
여자는 마침표를 찍다 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넘친 잉크로 여자의 손이 더러워졌다. 속이 메슥거렸다. 여자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아무것도 게워 내지 못하고 연신 헛구역질만 하는 여자. 맞은편 거울로 여자의 비뚤어진 얼굴이 보였다. 여자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몸을 일으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는 여자. 여자를 여자답게 하는 것들이 모두 색이 바래고 있었다. 여자가 알던 여자가 꺼져가고 있었다.
이게 다 뭐라고.
성냥불을 켜듯 탁, 기분 좋은 어지럼증이 여자를 삼켰다. 마침내 여자는 여자를 위해 불을 지르기로 했다. 온 마음에 가득 찬 잡스러운 것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불씨가 꺼져갈 때쯤 여자는 돌아갈 곳도 태워 버리기로 했다. 돌아갈 곳이 없으면 어디로든 나아갈 테니까. 매캐한 탄내와 텁텁한 그을음 속에서 여자는 소그노의 찬란한 여름을 떠올렸다.
여자는 수첩에서 종이를 찢어 버렸다. 인터넷 창을 열어 M의 이름을 검색하는 여자. M이 운영하는 음악재단의 웹사이트에서 M의 이메일 주소를 찾았다. 여자는 담담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M의 안부를 묻고 여자의 근황을 적은 뒤 혹시 여자가 소그노에서 봄을 보낼 수 있는지 물었다. 이메일을 보낸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M에게 답장이 왔다.
친애하는 a에게,
당신을 기억하느냐고요? 당연하죠. 당신같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당신이 여전히 당신답게 사랑스럽길 바랍니다. 집을 관리해 주시는 분에게 미리 말해 놓을게요. 우리는 여름에 소그노에 갑니다. 당신이 그때까지 머물러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네요.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마워요. 언제나 환영해요.
- M –
여자는 M의 이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무릎 담요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자는 맥락 없이 울다가 웃고 화내고, 또 웃다가 우는 자신의 모습이 기가 막혀 또 웃었다. 그래도 간신히 엉킨 실타래의 한쪽 끝을 손가락에 감아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방향은 맞는 것 같아 안심됐다.
여자는 서랍 속에서 오래된 글을 꺼내 읽었다.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글을 살펴보는 여자. 여자는 노련한 농부가 식물을 솎아내듯 막힘없이 문장들을 솎아냈다. 지지부진하던 지난날 따위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여자는 거침없이 글을 마름질해 나갔다. 여태껏 썼던 글의 절반 이상을 휴지통에 찢어 던져 버리며 여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진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Photo l ©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