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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교회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바람이 상냥하게 a의 뺨을 쓸었고 햇빛은 기분 좋게 a를 달궜다. 달콤 쌉싸름한 요정의 꽃향기가 마을 여기저기서 풍겨왔다. 며칠 새 완성된 광장 중앙 무대 주변에 요정 분장을 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꼬마들은 앙증맞은 날개를 펄럭이며 비눗방울 장수 주변을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a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교회 옆 상아색 벽에 새겨진 마을 지도를 살펴보는 a. 지도 위에 붙어 있는 작은 거울 위로 a의 꾸밈없는 얼굴이 비쳤다.
어디로 가지?
북쪽의 교회 첨탑? 남쪽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에 있는 상점가? 아니면 서쪽의 올리브 나무 농장? 음, 동쪽의 동굴?
생각에 잠겨 있는 a의 그림자 위로 더 큰 그림자가 겹쳤다.
“여기서 뭐 해요?”
누군가 a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엄마야!”
a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돌았다.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고 서 있는 P.
“원래 그렇게 잘 놀라요?”
P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물었다. 섹시한 녹색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불량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a. P가 마을 지도를 힐끗 보며 말했다.
“마을 구경하려고요?”
“네. 뭐, 축제잖아요.” a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가 안내해 줄까요?” 선심 쓰듯 되묻는 P.
솔깃한 제안에 a의 볼이 움찔했다. 답지 않게 무해하게 웃는 P. 잠시 고민하던 a가 입을 열었다.
“감사하지만 축제 준비로 바쁘실 텐데 괜찮아요.”
“흐-음, 후회할 텐데…….”
능글맞게 말꼬리를 흐리며 몸을 돌리는 P.
“P! 잠깐만요. 생각이 바뀌었어요. 시간 괜찮으면 안내해 줘요.”
a가 P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잘 생각했어요. 따라와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선글라스를 쓰고 앞장서는 P. a는 떨떠름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뒤따라갔다.
P는 a를 남쪽으로 데려갔다. 바다로 향하는 계단 양옆으로 즐비한 상점들. 아기자기한 상점가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좁은 계단이 붐볐다. 사람들을 헤치며 계단을 앞서 내려가던 P가 멈춰 섰다. 뒤따라 내려오던 a를 보며 왼쪽으로 고갯짓하는 P. P의 시선이 가리킨 곳은 상점 사이 좁은 틈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람이 한 명 들어갈 정도의 샛길이 보였다.
저런 곳에 길이 있다고?
a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우자,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씩 웃는 P. 동시에 인파에 밀린 a의 몸이 P에게 바짝 밀착됐다. 달콤한 향이 섞인 담배 냄새가 훅, a를 덮쳤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P에게 밀착된 몸을 떼 보려 버둥거리는 a. P는 그런 a를 한 팔로 감싸 안고 인파를 헤쳐 샛길로 들어갔다.
상점 벽과 지붕에 엉긴 덩굴에 가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좁은 길. a는 얼떨결에 잡힌 P의 손에 이끌려 길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P가 어느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잡고 있던 a의 손을 놓아주는 P.
“술 좋아해요?”
“네? 가끔 마셔야 할 때 마셔요. 술 마시려고요? 지금? 저 마을 구경 시켜준다면서요?” a가 잔소리하듯 쏘아붙였다.
“자, 들어갑시다. 소그노 제일의 핫 플레이스.”
a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상점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P. a가 상점 문 위에 간판을 보고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육점이요?…….”
망설이던 a가 정육점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구를 가린 비즈로 장식된 줄 커튼 뒤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공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a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네킹의 손과 팔, 색색의 가발, 고장 난 뻐꾸기시계, 주전자, 털장갑, 말랑한 엉덩이, 태엽으로 된 하트모양 장식, 나무 장작, 벽난로, 어느 나라의 전통 인형, 사탕이 주렁주렁 매달린 리본 장식, 두툼한 약 봉투, 피 묻은 주삿바늘, 새빨간 심장, 더러운 팬티, 레인보우 고글, 가죽 브래지어, 풍선처럼 부푼 콘돔, 나무 수갑, 총구가 휘어진 총, 찌그러진 수류탄 등……. 온갖 정체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가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벽 근처 가장자리로 밀려난 냉장고에는 시뻘건 생육이 부위별로 진열되어 있었고, 중앙 무대에는 요정 분장을 한 사람들이 짝지어 살사를 추고 있었다. 무대 위의 파랑, 빨강 그리고 초록색 조명이 어지럽게 돌며 사방을 비췄다.
어찌할 바를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는 a에게 지나가던 시가 걸이 상큼하게 윙크했다. 시가 걸은 가죽끈으로 고정된 나무 상판을 목에 메고 있었다. 상판에서 시가를 하나 집어 a에게 권하는 시가 걸. a는 양손을 가로저으며 뒷걸음질 쳤고, 시가 걸은 어깨를 으쓱했다.
곁으로 다가온 P가 상판에서 시가를 하나 집어 들고는 a를 빈 테이블로 데려갔다. 뒤따라온 돼지 분장을 한 웨이터에게 이탈리아어로 무언가를 주문하는 P. 웨이터가 자리를 뜨자마자 a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여기 도대체 뭐예요?”
“말했잖아요. 소그노 제일의 핫 플레이스라고. 주문은 내가 알아서 했어요. 괜찮죠?”
“첼리스트가 이런 데 와도 돼요?”
“첼리스트는 어떤 곳 가야 하는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구경시켜 준다고 하면 보통 유적지나 자연경관 같은 것을 보여주니까…….”
a가 쭈뼛거렸다. P가 별로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집어 온 시가를 섬세하게 돌려가며 불을 붙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 해요?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네. A의 여자 친구인 거 빼고.”
a의 눈동자에 조바심이 스쳤다. “회사 다녀요…….” a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뭐라고요? 음악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요. 크게 말해요.” P가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침을 크게 꿀꺽 삼키는 a.
“글 써요.”
“아, 작가였구나. 무슨 글 쓰는데요? 소설? 시? 각본?”
“소설이랑 시요.”
“어떤 내용이에요?”
글은 오래 썼지만 딱히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a는 말문이 막혔다. 누군가 쓰는 글에 관해 물으면 이유 없이 작아지는 a였다. 왜?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갑자기 미숙한 오기가 치밀었다. a가 턱을 당기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소설이랑 시 둘중에 하나 골라봐요.”
“시로 하죠.”
처음 보는 a의 기세에 흥미를 느꼈는지 P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음, 제목은 ’꼭지점’이에요.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할머니가 덩그러니 앉아서 숨 쉬고 계셨어요. 들이쉬고 내쉬고. 한참 동안 계속 그렇게 앉아 계셨는데, 그 모습이 ‘시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장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았고, 작년에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헌정 시로 써서 태워 드렸어요.”
“그럼, 소설은요?” 조금 슬픈 얼굴이 된 a를 보며 P가 물었다.
“소설, 소설이라……. 제목은 없어요. 몇 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의 시신을 모신 운구차가 고향 섬을 한 바퀴 돌았거든요. 그때 섬 구석구석을 돌아보는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아온 삶이 제 마음속에 뜬금없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그걸 썼죠.”
a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P가 곧 울 것 같은 a를 힐끗 보며 말했다.
“주로 누가 죽으면 영감을 얻나 봐요?”
“네?”
눈물이 쏙 들어간 a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농담이에요. 표정 풀어요.”
P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대답도 하지 않고 P를 노려보는 a.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P가 웃음기 가신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요. M이 말한 것처럼 타고난 제 천성이 그래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막 튀어나와요.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화 풀어요.”
기껏 용기 내서 말한 이야기가 농담거리나 되어 버리다니. a는 속이 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새삼스럽게 피아노 방에 두고 온 A의 얼굴이 떠올랐다.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은 P는 할 도리는 다했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시가를 피웠다.
때마침 웨이터가 하얀 꽃으로 장식된 보라색 음료 두 잔을 테이블로 들고 왔다. 매끈한 다섯 개의 하얀 꽃잎에 둘러싸인 보라색 암술과 수술. 자세히 보니 꽃잎의 깊은 안쪽은 옅은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말없이 꽃잎을 쓸어내리는 a를 힐끔 보는 P. P가 한결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정의 꽃으로 만든 칵테일이에요. 마셔봐요. 긴장이 풀릴 겁니다.”
생각보다 평범한 꽃이네, 중얼거리며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는 a. 상큼한 음료 맛과 씁쓸한 알코올 향이 가시자, 요정의 꽃 특유의 달콤 쌉싸름한 향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테이블 위에 흐르는 서먹한 분위기에 a는 말없이 계속 칵테일을 홀짝였다. 알딸딸한 술기운과 함께 기분 좋은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어느새 마음이 풀린 a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P가 피우는 시가를 쳐다봤다. P가 피식 웃었다.
“요정의 꽃을 통째로 말아 만든 거예요. 일반 시가와 달리 보관이 까다롭고 내용물도 금방 변질돼 버려서 오직 소그노에서만 생산하고 유통되죠. 한 번 피워 볼래요?”
담배도 피워본 적 없는 a가 의심의 눈초리로 P와 시가를 번갈아 봤다.
“괜찮아요. 해롭지 않아요. 시가로 말아서 피우면 술이나 차로 마시는 것보다 그 특유의 향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어요.”
a는 P가 건넨 시가를 피리를 불듯 양 손가락 끝으로 잡았다. 어색하게 시가를 입에 물고 깊게 훅 빨아드리는 a. 달콤 쌉싸름한 향이 단숨에 폐 속 가득 차올랐다. 너무 급하게 들이마셨는지 가슴 깊은 곳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 좋은 보라색 어지럼증. P의 입꼬리 한쪽이 추켜 올라갔다.
멈추지 않는 기침과 어지럼증에 덜컥 겁이 난 a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a에게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 P. a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P가 권한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P는 a가 두고 간 시가를 연달아 몇 모금 빨아드리고는 재떨이 위에 걸쳐 놓았다. 시가의 불꽃이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두툼한 연기가 P의 입안에서 울컥 쏟아져 나왔다.
기침은 멎었지만, 어지럼증은 여전히 a를 휘청거리게 했다. a는 정육점 구석의 벽 한편에 몸을 기대고 섰다. 잠시 후 균형감각을 되찾은 a의 귓가에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뜨자 빛줄기가 새어 나오는 공간 보였다. a는 훔쳐보듯 공간 안쪽을 들여다봤다.
부엌 안에는 뺨이 붉게 달아오른 노인이 함부로 칼을 부리고 있었다. 노인은 거대한 살덩이가 잘 토막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은 곳을 여러 번 내리쳤다.
꽂혔다, 뺐다. 꽂혔다, 뺐다. 꽂혔다, 뺐다. 꽂혔다, 탁- 놓았다.
책 한 권 크기의 네모난 칼날이 살덩이에 박혀 부르르 떨렸다. 칼 손잡이에서 손을 뗀 노인이 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한껏 치켜올렸다. 말려 내려간 하얀 긴 양말도 무릎 위까지 당겨 신었다. 양 갈래로 촘촘히 땋은 머리카락이 노인의 가슴께에서 덜렁거렸다. 노인은 피가 몰려 검푸른 빛이 도는 양손으로 다시 칼을 쥐었다. 노인이 있는 힘껏 살덩이에 박힌 칼을 빼냈다. 반동으로 노인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푹. 노인이 온 힘을 다해 내리치자 단번에 두 동강이 나는 살덩어리. 노인은 나무 도마에 깊이 박힌 칼을 거두어 더러운 행주로 칼날에 묻은 살점을 닦아냈다.
시선을 느낀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a를 바라보며 씩 웃는 노인. 노인의 입속에는 치아가 없다. 노인이 토막 낸 살덩어리처럼 맨질맨질한 노인의 잇몸. 칼을 쥐고 웃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기이하다 못해 괴이했다. a의 마음속에 노인이 a의 부드러운 몸을 숭덩숭덩 토막 내 버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능숙하게 뼈와 살을 분리하고, 작업대 위에 흥건한 피를 녹슨 양동이에 손으로 쓸어 담는 노인. 목까지 절단된 a의 머리는 고개가 사선으로 돌아가 있는 탓에 그 모든 광경을 곁눈질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속에 가득한 참혹한 심상에도 a는 어쩐지 의연했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하게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는 a. P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는 a의 얼굴 위로 스산한 삼색 조명이 스쳤다. 요정 분장을 하고 무대 위에서 살사를 추는 사람들의 늘어진 살이 반박자씩 늦게 출렁거렸다. 영상과 음향이 맞지 않는 늘어진 필름 영화의 장면 같은 주변을 둘러보며 a는 중얼거렸다.
오늘 조금 희한하네.
테이블로 돌아온 a는 수첩을 꺼냈다.
정육점, 냉장고, 시가 걸, 칵테일, 노인, 네모난 칼, 살점, 더러운 행주, 긴 양말, 잇몸, 살사, 돼지, 요정의 꽃과 같은 단어들을 수첩에 적고 펜을 입에 무는 a. P는 그런 a의 모습을 빙긋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Photo l ©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