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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희한한 광경을 많이 보네요. P 덕분인가.”
상점가를 빠져나와 바다를 향해 걷던 a가 농담조로 말했다.
“원래 차원이 뒤틀리면 ‘그런 것’이 눈에 많이 띄죠.” P가 넉살 좋게 맞받아쳤다.
“네?” a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떤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때 차원들이 살짝 뒤틀리거든요. 그럼, 그 틈 사이로 평소에 보지 못했던 ‘그런 것들’이 새어 나와요. 원래 있던 차원에서 나온 여행자는 다른 차원에 도달할 때까지 ‘그런 것들’을 보거나 겪게 되는데, 뭐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그런 것들’은 당신을 절대로 해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아까 한 것처럼 의연하게 넘기면 돼요.”
“도대체 무슨…….”
“‘그런 것들’의 형태나 기운은 사람마다 달라요. 잠재된 욕망이 묻어 나오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a의 ‘그런 것들’은 꽤 흥미롭네요. 의외예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P와 그런 P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a. a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P가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SF 취향은 아닌가 보네.”
기막힌 농담을 태연하게 하는 P를 보며 a는 그저 혀를 내둘렀다.
“한 번을 안 져주네요.”
툴툴거리는 a에게 M에게 하던 것처럼 씩 웃어 보이는 P. 아주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다행히 많이 밉진 않다고, a가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해변에 다다르자 발밑으로 크고 작은 파도가 밀려왔다. 어수선한 a의 머리와 마음을 식혀주는 시원한 파도 소리. a가 <매직 인 소그노>의 멜로디를 작게 흥얼거렸다.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P의 입술이 흐뭇하게 일그러졌다. a가 흥얼거리는 멜로디 위로 피아노 소리가 겹쳐 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a. P가 아는 체를 하며 말했다.
“맞아요. 피날레 곡 <매직 인 소그노>.”
조금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a가 걸음을 재촉했다. 빨라지는 발걸음만큼 더 선명해지는 피아노 소리. 마음이 급해진 a가 먼저 뛰어가 버리자 P도 신이 난 얼굴로 a를 뒤따라갔다.
a는 까치발을 하고 사람들 머리 사이사이를 살폈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곳 중심에는 과장된 몸짓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온몸을 들썩거리고 움찔거리는 남자의 눈에는 옅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 어딘가 이질적인 광경에 더 자세히 남자를 살펴보는 a. a는 남자의 움직임과 연주 소리가 미묘하게 맞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들려오는 음악은 피아노, 남자가 연주하고 있는 것은 아코디언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리고 주먹을 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남자의 양손에 사실은, 손가락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a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옆에 있는 오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서 연주하는 척하고 있는 겁니다.” a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던 P가 a의 정수리에 대고 말했다. “굳이 왜…….” a가 P로부터 한 발짝 떨어지며 물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어요. 어느 날 편지 한 통 남기지 않고 떠나버린 아내를 찾아다니다 미쳐버렸대요. 뭐, 소문에는 요정을 찾아간 뒤에 저렇게 됐다는 말도 있어요.”
“요정이요?”
“네,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해 주는 요정이요.”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의 대답이요?”
“전설에 의하면 그 대답을 들으려면 질문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요정에게 대가로 줘야 한다고 해요. 사람들은 남자가 아내가 떠난 이유를 알기 위해 남자의 손가락을 요정에게 줘버렸다고 수군거리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a가 생각이 많은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연주는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지나 끝을 향하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 열광적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척하던 남자가 곡의 마지막 음과 함께 그대로 멈춰버렸다. 바닥으로 축 늘어진 남자의 양손이 고장 난 시계추처럼 덜렁거렸다. 굵은 핏줄이 선 남자의 뭉뚝한 손을 바라보는 a. 쓸쓸한 정적이 누군가의 박수 소리로 깨졌다. 사람들이 남자에게 동전을 던져 주었다. 남자는 광대처럼 웃으며 양 손바닥으로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웠다. 남자의 모자 안으로 동전을 던져주며 넌지시 묻는 P.
“한번 만나 볼래요? 그 요정?”
“네?”
“내가 데려다줄게요. 그 요정이 있는 곳으로. 서쪽의 올리브 나무 농장으로 같이 가요, 나랑.”
“지금요?”
“네, 지금. 농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버려진 낡은 회전목마가 있어요. 바로 거기에 요정이 있죠.”
해답지를 몰래 훔쳐본 사람처럼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하는 P. a는 P가 하는 말들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위로 떠오르는 부끄러운 질문들에 어지러웠다.
“답을 찾지 못한 질문 같은 거 없나 봐요?”
도발하듯 묻는 P. a의 뺨이 꿈틀했다. 언젠가는 물어야 할 질문들이 속닥거렸다. a는 요정에게 줘야 할 소중한 대가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a가 뿌리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쫓기듯 마음을 정한 a가 입을 열었다.
“돌아갈래요. 너무 늦었어요.”
P는 군말 없이 고개를 까딱했다. 되돌아가는 방향 쪽으로 손을 들어 길을 권하는 P.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어디론가 되돌아가고 있는 a의 몸과 달리, a의 마음은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잖아. a가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졌다. 먼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들 위로 밝은 빛이 하나둘 켜졌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 뽀얗게 타오르는 빛.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빛이 검은 바다를 가득 밝혔을 때, 빛은 천천히 허공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멀리까지 퍼져 나가는 빛. 이내 드넓은 검은 하늘도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 찼다. a는 걸음을 멈추고 경계가 모호한 검은 바다와 하늘 사이를 두둥실 떠다니는 빛을 바라보았다.
“풍등을 날리는 거예요. 사라져 버린 요정들을 위해서.” P가 지루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정말 희한하네.
a는 피아노, 아코디언, 뭉뚝한 손과 핏줄, 영원히 알 수 없는 질문의 대답, 요정, 서쪽의 올리브 나무 농장, 회전목마, 풍등 같은 단어들을 작게 중얼거렸다.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높은 음자리표 조명이 보였다. 언제 고친 건지 말려 들어간 꼬리 부분에도 불이 들어와 있는 조명. 이렇게 가까웠었나. 하며 a가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가요.”
“오늘 고마웠어요. 덕분에 좋은 구경 많이 했어요.”
“별말씀을요.”
P에게 눈인사하고 문고리로 손을 뻗는 a.
“혹시 마음이 바뀌면 말해요.”
“네?”
a가 고개를 돌려 P를 바라보았다.
“서쪽으로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구요.”
P의 녹색 눈동자가 신비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a가 희미하게 웃으며 잡고 있던 문고리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빨려 들어가듯 문 안으로 사라져 버리는 a. P는 꽤 오랫동안 a가 사려져 버린 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문이 닫히고 깜깜해진 방안. a는 덜컥 겁이 났다. a가 서둘러 불 꺼진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이 휘어지는 곳에 그대로 있는 두 개의 문. A가 기다리고 있을 오른쪽 문을 선뜻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a.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왼쪽 문이었다. 용기를 낸 a가 왼쪽 문에 양손을 짚고 귀를 대보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고요한 반대편. a가 손바닥에 힘을 실어 문을 밀었다. 마치 반대편에서 누가 밀고 있기라도 한 듯이 꼼짝하지 않는 문. a가 손에서 힘을 조금 뺀 순간,
달그락!
요란한 소리가 났다. a가 한 발짝 성큼 다가섰다. 다시 고요한 반대편. 잠시 후 거짓말처럼 스르르 열리는 왼쪽 문. 어? 반가운 마음에 황급히 손을 뻗는 a. 열린 문틈 사이로 차가운 물방울이 튀어나왔다. a가 문을 잡으려는 순간, 오른쪽 문에서 A의 피아노 소리가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처럼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a가 뻗던 손을 가슴 쪽으로 움츠렸다. a의 손등에 튄 물방울이 손목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찰나에 이미 닫혀버린 왼쪽 문. 문 반대편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점점 더 커지는 A의 시끄러운 피아노 소리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a는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A가 방 안에서 쇼팽의 <24개 전주곡> 중 24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A의 음악이 기다렸다는 듯 a를 꽉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a를 조여 오는 음표들. 주변을 뱅뱅 돌며 조금 풀어주는가 싶더니 다시 또 강하게 조여 오는 24번. a는 마른침을 삼키며 호흡에 집중했다. 마지막 곡이니까 곧 끝날 거야.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을 받는 것처럼 2분 30초가량의 곡을 꿋꿋이 참아내는 a. 천둥 같은 24번의 마지막 음이 끝나는 동시에 a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잔인하게도 쉬지 않고 바로 전주곡 22번을 연주하는 A. 22번, 16번, 12번, 8번, 18번, 20번, 10번, 2번……. 쇼팽의 <24개의 전주곡>을 마구잡이로 연주하며 사납게 a를 구석으로 몰아세우는 A. a의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a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a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의문스러워졌다. 손을 들어 손가락을 구부려보는 a.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손가락도, 손가락을 덮고 있는 손톱과 살갗도, 손가락 위로 느껴지는 예민한 감각과 미세한 떨림까지도 a가 인지하고 있는 모든 것이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a가 있는 곳은 더 이상 a의 차원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a는 흐르고 있었다. 아니 떠내려가고 있었다. a가 이것은 비단 손가락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을 때, a의 동물적인 직감은 알아차렸지만 a는 본체는 아직 몰랐던 바로 그때, 겁먹은 a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a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이 좋았다. 다른 어떤 곳으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매분 매초 마다 급변하는 그것들을 모두 꽁꽁 묶어 땅속 깊은 곳에 처박아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이 더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a가 피아노 방을 뛰쳐나갔다.
혼자 남겨진 A가 <매직 인 소그노>의 메인 멜로디를 오른손으로 띄엄띄엄 연주했다. 건반 위로 뚝뚝 떨어지는 A의 눈물. A는 왼손을 더해 원래대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건반 위에서 외로이 춤추는 A의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손끝이 터져 피가 나기 시작했다. 피와 눈물로 엉망이 되어 버린 하얗고 까만 건반들. 눌리는 건반 틈 사이사이로 A의 비애가 아스라이 스며들었다.
Photo l ©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