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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27. 2024

매직 인 소그노 *10

*10



a에게,


나의 온몸과 마음에 옅은 안개가 내려앉은 것 같아.

지난밤 공연이 끝나고, 나는 당신이 남기고 간 편지를 읽고 또 읽다가 잠이 들었어. 어쩐지 아주 많이 울었던 것 같은데 그게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꿈에서 당신을 만났던 건 확실해. 왜냐하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당신 생각이 났거든. 습관처럼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나는 당신의 편지를 다시 읽었어. 이번에는 첫 문단을 다 읽기도 전에 편지를 내려놓아야만 했어. 당신의 편지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의 2악장을 연주하고 싶게 만들었거든.


어젯밤, 소그노의 저녁 하늘은 신비로운 보랏빛이었어. M이 특별히 준비해 준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는 아주 근사했어. (나는 그 피아노가 여성이었다고 확신해!) 온화하고 친근한 음색의 친구였는데, 피날레 곡 <매직 인 소그노>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연주할 땐 180도로 돌변하는 모습이 꼭 당신을 닮았더라. 그녀를 연주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당신도 분명 그녀를 좋아했을 거야. 그 황홀하고 신성한 순간에 우리가 모두 함께였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당신의 선택과 방향을 존중해. 어제 바람이 꽤 강하게 불었는데 비행기 안에 있었을 당신에게도 내 음악이 닿았길 바라.


당신이 속이 빈 인형 같은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는 모습이 생각난다. 알맞은 단어를 찾으려고, 그 표정을 짓고 있는 당신은 고도로 고독해. 그 표정은 당신의 많은 것들을 상징하는 것 같아. 깊은 내면의 삶에 대한 호기심, 상상력, 순수성, 진실성, 성실성과 같은 것들 말이야. 장담하건대 누구도 당신의 그 표정을 흉내 낼 수 없을 거야. 당신은 고유해.


언젠가 내가 말한 적 있었지. 몇 해 전 나의 오래된 선생님 R이 죽고 난 뒤에 나는 오랫동안 길을 잃은 상태였다고. R은 나에게 음악과 영혼의 안내자 같은 분이었어. 우리가 처음 만난 날, R은 아주 짙은 독일 억양으로 내게 말했어. ‘A, 넌 절대로 쌀쌀맞게 연주할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넌 A니까!’라고. 그 말은 언제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일깨워주고 용기를 북돋아 줬어. R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R이 죽던 날 내가 잡고 있던 그의 투박한 손도 마찬가지고. 아, 그의 마지막 말은 바로 ‘음표!’였어.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 R답다고 생각했지, 뭐야. 그는 한 발은 이곳에 다른 한 발은 그곳에 걸치고 있는 사람이었어. 나는 이따금 그의 완전한 참됨과 순결, 기쁨, 친절이 그리워.


그리고 당신은 R만큼 나에게 큰 사랑과 영감을 준 사람이야.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그러니까 내가 아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때, 나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답게 사고할 수 있지?’라고 D에게 문자를 보냈어. D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어. ‘넌 반드시 그녀를 사랑해야만 해.’라고 말이야.


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때조차 당신에게 깊이 감동했던 거야. 그렇게 사고할 수 있는 누군가가 아직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길을 잃고 방황하던 나에게 큰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어. 당신의 사랑은 닫혀 있던 나의 마음을 열어주었고, 당신이 세상을 보는 깊고 아름다운 방식은 나에게 영감이 되었어. 당신의 단어들을 읽고 듣는 건, 마치 당신과 달콤한 키스를 나누는 것만 같았어. 당신을 만나게 된 건 내 인생의 다시없을 행운이야. 


당신이 얼마나 놀라운지 존재인지 당신은 알까? 당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을 이롭게 하는지 당신은 알까? 당신은 언제나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는 걸, 당신은 알까? 


당신은 기적이야.


소그노에서 당신을 만난 모든 사람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우리는 당신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당신이 남기고 간 사랑과 영감을 함께 나누며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어. 소그노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을 둘러싼 아름다움을 계속 탐구할 수 있는 영감이 되었길 바라. 또 당신 삶의 방향과 당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자신감과 확신을 가졌길 바라. 당신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당신만의 방법을 얼른 찾길 바라. 무엇보다 나는 당신이 용기를 가지고 강해지길 바라.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는 당신을 끈질기게 기다릴 거야. 모든 측면에서 당신에게 사랑을 주고 당신을 응원할 거라고 약속할게. 


그런데 왜 나는 벌써, 당신의 얼굴과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걸까? 당신의 다정한 키스가 저 멀리 떨어져 빛나고 있는 별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야. 물론 나는 그 별들과 우리 사랑과 세계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 그 별들의 빛이 내가 나의 음악으로 향하는 여정의 안내자가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 그렇지만 나를 괴롭히는 이 거리감의 정체는 뭘까? 잠깐만, 내가 왜 당신한테 편지를 쓰고 싶었는지 모르겠어. 지금 내 말에는 논리조차 없는 것 같아. 사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분명한 것은 오직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내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든 그 사랑이 커지리라는 것뿐이지. 하지만 그때 당신이 말한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헤어져야 하는 때가 오면 어쩌지. 조금 혼란스러워. 아! 아마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 것 같아. 내 몸은 소그노에 있지만, 나의 영혼은 당신과 함께 공항으로 떠났어. 아마 평소의 나답게 터미널에서 길을 잃었을 수도 있지. 당신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당신이 벌써, 아주 보고 싶다.


A가.








Photo l ©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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