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분명히 연결되어 있어.”
a가 읽던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던 연주를 멈추고 a를 바라보는 A.
“쇼팽의 <24개의 전주곡>에서 3번 하고 4번 말이야. 뭔가 연결된 것 같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a. A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났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양 눈썹을 추켜세우는 A.
“두 곡 분위기도 느낌도 완전히 다르잖아? 그런데 3번 끝부분이랑 4번 시작할 때 뭔가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마치 한 곡 같아. 들을 때마다 매번 생각했어.”
“더 자세히 설명해 줘.”
A가 턱에 손을 괴고 부러 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이건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어려워. 뭐랄까, ‘동물적인 직감’ 같은 걸로 받아들이는 거야. 그냥 나한테는 그 두 곡이 완전한 하나의 곡으로 인지 돼. 15번 하고 16번도 마찬가지고.”
A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a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속이 텅 빈 인형 같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a. 칠흑 같은 긴 생머리가 a의 오른쪽 뺨을 가렸다.
“나는 당신의 그 섬세함(Sensitivity)을 사랑해.”
A가 a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a의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는 A. a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A를 바라보았다. A는 그런 a에게 한 번 더 입 맞추고 이어 말했다.
“전주곡 3번 오른손 마지막 화음에 쓰인 두 개의 B가, 전주곡 4번 첫 선율 음에 쓰인 두 개의 B와 같아. 그리고 같은 순서로 쓰였어.”
“말도 안 돼.”
a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말했다.
“맞아. 진짜 말도 안 되지? 악보도 읽을 줄 모르는 당신이 그걸 들어내다니. 아니 느낀다고 해야 하나? 이건 정말 말이 안 돼.”
A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말했다.
“듣거나 느끼는 게 아니야. 스며든다고 해야 하나? 받아들인다고 해야 하나? ‘인지 한다’라는 표현이 제일 가까운 거 같아. 그건 원래 그런 건데 내가 그냥 알아차리는 거야.”
a가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답답하다는 얼굴로 하소연하듯 말했다.
“나 흥분돼. 당신이 이럴 때마다.” A가 a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돼. 당신 지금 연습 중이잖아. 그리고 나 아직 이 책도 다 못 읽었어.” a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A가 일부러 어깨를 축 내리며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응 중요해. 당신은 타고난 천재라서 모르겠지만.”
a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A가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피아노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장난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아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 A. A는 쇼팽의 <24개의 전주곡>을 3번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짓궂어.”
a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부러 들으라는 듯이 전주곡 3번의 마지막 화음을 하나씩 아주 부드럽게 굴려 치고는 곧바로 전주곡 4번을 연주하는 A. a의 아랫도리가 저릿했다. 조금 가빠진 숨에 a의 입이 벌어졌다. a는 읽던 책을 눈 밑까지 바짝 들어 올렸다. 전주곡 4번이 끝나자마자 들고 있던 책을 내리며 크게 소리치는 a.
“무엇보다 지금 내 기분은 슈베르트야!”
동시에 전주곡 5번을 연주하기 시작한 A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방정맞게 웃으며 평소보다 더 강하게 건반을 누르는 A. 전주곡 5번이 폭발하듯 방안을 가득 메웠다. 30초 남짓한 전주곡 5번이 끝나자마자 A가 a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 못 참겠어.” 하며 a를 피아노 의자 옆자리에 앉히는 A. A의 혀가 a의 벌어진 입술 사이를 무례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a의 입안 가득 고이는 A. a가 낮게 신음하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a를 바라보고 있는 낯선 눈. 움찔한 a가 입술에 힘을 주자 꾸중하듯 a의 입술을 살짝 깨무는 A. a가 몸을 들썩이자, A가 얼굴을 떼고 희미하게 웃었다.
A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의 3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강하고 빠른 연주에 a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아주 조금씩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연주하는 A. 능수능란하게 곡의 속도를 조절하는 A의 연주에 맞춰 a의 심장이 꼭두각시처럼 점점 더 빨리 뛰었다. 난생처음 춤을 추는 사람의 스텝처럼 꼬이는 a의 호흡. a가 가슴 위에 손을 모으고 몸을 웅크렸다. 그 옆에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연주하는 A. A의 호박색 눈동자가 기괴하게 반짝거렸다. 덜컥 겁이 난 a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A의 이름을 불렀다. 반응 없이 계속 연주하는 A. 참다못한 a가 A의 허리를 와락 감싸안았다. A의 눈이 버튼을 누른 카메라의 셔터처럼 깜빡였다.
“미안, 미안해.”
그제야 연주를 멈춘 A가 엎드려 안긴 a의 등을 쓰다듬었다. a가 고개를 들어 A를 바라봤다. a의 일그러진 얼굴 위로 비치는 순결한 고독.
“당신이 품고 있는 게 뭔지, 당신은 알까.”
A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a는 A의 말을 들었을까?
“당신은 꼭 좋은 수프를 만들 거야.” 투명한 얼굴로 말하는 A. A의 호박색 눈동자에 순결한 환희가 서렸다. “응? 수프?” a가 되물었다.
“응, 베토벤이 그랬거든. 오직 마음이 순수한 사람만이 좋은 수프를 만들 수 있다.라고.”
a가 피식 웃었다. 어금니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른 떫음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a가 쥐어짜듯 볼을 강하게 빨아드렸다. 쯧, 불량한 소리를 내며 오직 A만 아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a.
“사랑해.”
A가 a의 뺨을 쓸며 말했다. A를 더 꽉 끌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는 a. 포근한 A의 체취가 a의 온몸을 휘감았다.
Photo l ©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