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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27. 2024

매직 인 소그노 •5

•5



여자는 다시 소그노에 있었다.


글을 쓰러 왔지만 글은 쓰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쓸 수 없는데 몇 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자는 그냥, 쓰지 않기로 했다.

주홍빛 가로등, 사람들로 북적이는 야외 광장, 검고 푸른 남쪽의 바다, 볕이 좋은 옥상, 높은 음자리표 조명, 벽에 걸린 이름 모를 화가들의 그림과 계단이 휘어지는 곳에 있는 두 개의 문까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소그노에서 여자는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었다. 깨끗하게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직접 고른 신선한 식재료로 건강하고 맛있는 요리도 만들어 먹었다. 정원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마냥 넋을 놓고 있기도 하고, 색색의 꽃봉오리가 가득 맺힌 줄기들이 뿌리를 내린 땅을 고르기도 하며 여자는 만발한 봄을 기다렸다. 여자의 유한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 잔잔한 밤. 여자는 잠에서 깼다. 마치 영원히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불도 켜지 않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여자. 색을 알 수 없는 잠옷의 끝자락이 여자의 맨발 위에서 하늘거렸다. 다시 마주한 두 개의 문. 여자는 두 개의 문 사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끌어안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는 여자. 여자는 누군가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달그락”

여자가 담담하게 눈을 떴다. 팽팽한 정적. 온 정신을 청각에 집중해 보는 여자. 


달그락”

여자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왼쪽 문에 양손을 짚고 귀를 대보는 여자.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반대편. 여자는 손목을 타고 흐르던 물방울의 감촉을 떠올렸다. 


“거기 누구 있어요?” 

여자가 문에 가볍게 노크하며 물었다.

“괜찮아?”

투명한 목소리가 문틈으로 굴러 나왔다.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여자의 말문이 턱 막혔다. 또 바보처럼 눈물이 찔끔 났다. 여자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고요한 반대편. 그새 목소리가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 난 여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누구세요?”

“나는 목소리야.”

당연하고도 의심스러운 목소리의 대답에 여자는 또 말문이 막혔다. 

“괜찮냐고 물었잖아.”

목소리가 다그쳤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여자가 대답했다.

“아니.”

“왜?”

“나 안 괜찮아. 괜찮은 척하는 거야.”

“왜?”

“그래야 하니까?”

“왜 그래야 하는데?”


여자의 말문이 또 막혔다. 이유도 모르고 괜찮은 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우스웠다. 긴장이 풀린 여자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여과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예의 바르게 자기소개를 하고(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여자. 


남자와의 첫 만남, 함께 나누었던 마음과 생각, 공감과 격려, 고독과 환희, 부끄러운 열등감과 자격지심, 세계와 방황, 추억과 이별, 분노와 미련……. 줄곧 외면해 왔던 남자와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게우듯 쏟아내는 여자. 문 반대편은 아주 고요했지만, 여자는 목소리가 자신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의 말이 끝나자 잠자코 듣고 있던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행운이네.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랑을 했다니.”

응어리졌던 여자의 마음에 툭, 금이 갔다. 

“게다가 그 사랑의 가치를 오롯이 인지하고 지금은 그 사랑의 이별을 감당해 내고 있는 거잖아? 잘하고 있네. 뭐가 문제인 거야?”

커서를 깜박거리며 모두를 위한 모범답안을 써 내려가는 인공지능처럼 대답하는 목소리. 별일 아니라는 듯 딱딱하게 되묻는 목소리에게 여자가 칭얼거렸다. 

“너무 아팠어.”

“그건 당연한 거잖아. 그리고 이미 그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잖아. 언젠간 이렇게 될 거라는 거.”

매몰차게 대꾸하는 목소리에 여자가 입술을 오므렸다. 목소리가 새침하게 이어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까지 그 차원에 머물러 있을 거야?”

들킨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는 여자. 


“지루해. 다른 이야기 해줄래?" 목소리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목소리의 무례하고 직선적인 태도에 여자는 알 수 없는 후련함을 느꼈다. 이미 다 아물고 새살까지 돋은 상처 위에 고집스럽게 감고 있던 때가 탄 붕대와 끈적한 반창고를 떼어버린 기분이랄까. 여자는 읽던 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 글감, 단어, 문장, 문체, 구조. 모두 다 내가 선택해야 하는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아무것도 못 쓰겠어.”

“미술관 가는 거 좋아해?”

“어, 근데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여자가 H에게 하듯 정색했다. 목소리가 웃음이 섞인 말투로 달래듯 말했다.

“상관있어. 들어봐.”

목소리에게 욱하다니. 무안해진 여자가 헛기침했다.

“현존하는 모든 명작을 모두 모아 놓은 미술관이 있다고 치자. 거기에는 모네도 있고 고흐도 있어. 다빈치도 있고 피카소도 있지. 명작의 기준은 모두 다르니까 그냥 네가 생각하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다고 상상해 봐.”

“와, 미쳤다.”

“야.”

“알겠어. 상상만 해도 배부르다.”

여자는 왠지 문 뒤의 목소리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뭐해? 나 지금 미술관 안에 있어. 나 뭐 하면 돼?”

“거기에 같은 작품 있어?”

“어?”

“똑같은 작품 있냐고, 거기에.”

“비이-슷한 건 있는데?”

“비슷한 거랑 똑같은 거랑 같아?”

“아니.”

“답 나왔네.”

여자가 멍청한 얼굴로 문을 응시했다. 마치 문 반대편에서 여자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는 목소리.


“똑똑한 줄 알았었는데 착각이었나.”

“저기, 거기서 잠깐 나와 볼래? 이런 이야기는 얼굴 보고 하자.” 

여자가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문 좀 열어봐.”

“안돼. 그럼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야.” 목소리가 엄격하게 말했다. “나는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어. 나의 고유함을 지켜줘.” 

목소리의 기세에 여자가 몸을 움츠렸다. 여자는 하고 있던 대화로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 답이 뭔데?”

여자는 실체도 모르는 목소리의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목소리가 탄식하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어지는 목소리의 대답. 


“그 위대한 예술가들도 다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예쁘다고 생각하거나, 관심 있는 것 혹은 직면한 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느끼는 대로 쓰고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며 살았다고. 그러니까, 너도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네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쓰고 향유하며 살면 된다고.”

목소리는 여자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네가 숨쉬기 시작한 순간부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낀 것들 다 네 거야. 이 세상 그 누구도 너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없어. 너의 모든 순간을 오롯이 경험한 사람은 오직, 너 하나니까 아무도 절대 네가 될 수 없어. 그러니까 그냥 네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면 저절로 네가 묻어 나올 거야.”


“그렇지만 난 정말 좋은 작품을 쓰고 싶은걸?”


“그럼 좋은 것을 더 많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껴야겠네. 그게 그대로 네 글에 묻어 나올 테니까. 뭐 어차피 ‘좋은 것’도 네 기준에 따른 선택의 결과물이라 이미 네가 쌓아온 취향이 묻어 있긴 하다만……. ”

여자는 문 반대편에서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꽤 신이 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목소리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는 여자에게 다그치듯 묻는 목소리.


“그리고, 좋은 작품이 도대체 뭔데?”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인정하는 작품?” 이번엔 여자도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누군가에게 좋은 작품이 누군가에겐 나쁜 작품이 될 수도 있어. 그건 무척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거야.”

“나도 그런 건 알아.”

“아는데 왜 그래?”

목소리가 쏘아붙였다.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목소리는 조금 얄미웠지만, 논점이 있고 시원시원했으며 무엇보다 두리뭉실한 여자에게 필요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뭐.” 

여자가 목소리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목소리는 개의치 않고 따지듯 물었다.

“네가 쓰고 싶은 것을, 네가 쓰고 싶을 때, 네가 쓴 네 글인데 왜 타인이 기준이 돼?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그 ‘정말 좋은 작품’이 네가 좋아하고 네가 스스로 인정하는 작품이어야지, 왜 타인이 좋아하고 타인이 인정하는 작품이어야 하느냐 이 말이야.”


“내가 무슨 혼자 비밀 일기 쓰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는 내 글을 읽을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좋아하고 인정 해주고 계속 읽어줘야 ‘가치’가 있는 거 아니야? 작가가 있으면 독자도 있어야지. 작가 혼자 어떻게 존재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지. 넌 지금 헷갈리고 있어.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와 ‘좋은 글을 쓰고 싶다.’와 ‘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어쩌지.’를. 서로 다른 문제와 고민을 왜 섞고 있어? 뭐 부대찌개야? 안 그래도 태생적으로 복잡한 너를 왜 스스로 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거야? 아, 일부러 그러는 건가? 혹시 너 마조히즘?”


“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거기서 좀 나와봐.” 

논쟁과 갈등에 익숙하지 않은 여자가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그리고 네 작품의 가치가 있고 없음의 기준이 또! 타인이잖아. 너 그 많은 사람들 다 만족시킬 수 있어? 이 세상에 오직 네가 단 하나인 것처럼 세상 사람들 다 유일해. 그 많은 사람한테 어떻게 다 사랑받고 인정받을 거야? 그건 신도 아직 못 해낸 건데? 감히? 네가? 왜 네가 영원히 컨트롤할 수 없는 것에 결정권을 내어주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거야? 너 시간 많아? 네 그 빛나는 젊음이 영원할 것 같아? 아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숨쉬기 시작한 순간부터 너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는 이미 정해졌어. 유.한.하.다.고. 그 귀한 걸 왜 미련하게 네가 절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것에 쓰려고 해?”


“원래 이런 걸 어떡해!”

여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여자를 매섭게 몰아붙이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잘난 너한테는 쉬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원래 이래. 그냥 이렇게 태어났어. 이것저것 떠오르는 거 다 섞어서 부대찌개가 뭐야, 아주 잡탕을 한 솥 끓여서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뺑글뺑글 돌다가 겨우 기어 나와서 답을 찾아.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찾은 답은 곧 깨져. 왜냐하면 난 아주 유연하고 너그럽거든. 옳고 그름과 그때의 답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깨지게 돼있어. 새로운 기준과 필연적인 예외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지. 그러면 나는 그냥 ‘그렇게 됐군.’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또다시 다른 답을 찾아 나서. 아무리 오래 걸려도 절대 포기 하지 않고 또 답을 찾아내지. 분명히 말하겠는데 나는 ‘정답’을 찾고 있는 게 아니야. 그게 바로 내가 누구처럼 타인에게 함부로 답을 단언하거나, 옳고 그름을 강요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게 바로 나야. 네가 방금 그랬잖아. 이 세상에서 나는 유일하다며. 어차피 너도 네가 아니니까 영원히 날 100센트 이해 못 해. 네가 보호받고 존중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도 그냥 ‘나’이고 싶어. 그러니까 너도 나의 고유함을 지켜줘. 그게 아니라면 그냥 가던 길이나 가버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에 여자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 네가 네 입으로 직접 말한 것처럼, 넌 원래 그런 사람이고 아무도 영원히 널 100센트 이해 못 해. 그러니까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글을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싶을 때 써.”


여자가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괜찮아.”


참고 있던 들숨도 의식적으로 길게 내뱉었다.  


“고흐도 모네도 다 그렇게 살았어.”


목소리에게 또 당한 기분이었지만 어쩐지 싫지 않았다. 따뜻한 온천 속에 몸을 담근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축 늘어졌다. 기분 좋은 노곤함이 여자의 몸을 휘감았다. 줄곧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의식적으로 펴보는 여자. 혈색이 돌아온 여자의 손바닥 위로 놀라운 감촉들이 들끓었다. 여자의 입에서 끄윽- 하고 시원하게 트림이 나왔다. 민망함에 손으로 얼른 입을 가리는 여자. 문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대놓고 키득거렸다. 


왼쪽 문에 등을 대고 기대앉아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바로 옆 피아노 방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여자. 남자와의 기억이 타인의 기억처럼 낯설게 일렁였다. 날이 밝는지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뚜껑이 닫힌 피아노 위에 사선으로 그어진 얇은 빛줄기. 여자는 다시 왼쪽 문에 등을 대고 기대앉았다. 목소리에게 실없는 농담을 거는 여자. 목소리가 제법이라며 여자를 추켜세워주자 여자가 깔깔 웃었다. 여자는 목소리와 함께 있는 지금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방의 문이 소리 없이 저절로 닫혔다. 







Photo l ©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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